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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103위 성인 | 124위 복자 | 김대건 | 최양업 | 2차 시복대상 133위 | 2차 시복대상 81위 |
김대건 :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0-18번째 (서울/상해에서)
 paxkorea    | 2012·12·16 15:51 | HIT : 4,281 | VOTE : 810
● 김대건 부제의 열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3월 27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신부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작년에 지극히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을 모시고 몽고를 출발하여 변문까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조선에서 온 신자들이 이미 도착하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교님께 담당 선교지인 조선에 입국하는 데는 난관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저를 먼저 조선에 파견하시어 제가 조선의 정세를 살펴보고 그 가능성 여부에 따라 주교님의 입국을 주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페레올 주교님의 강복을 받고 한밤중에 신자들을 따라 출발하여 해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바라보이는 곳까지 왔습니다.
거기에 이르러 연락원들에게 어떠어떠한 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약속을 하고서 연락원들을 앞세워 보내고 저 혼자 의주에서 20리가량 떨어진 산골짜기를 찾아들어 울창한 숲속 어둠침침한 나뭇가지 밑에 몸을 숨겼습니다.
사방에 눈이 쌓여 산촌이 모두 하얗고 싸늘한데 밤이 되기를 기다리자니 어찌나 지루한지 묵주의 기도를 수없이 거듭하였습니다.
해가 지고 친지가 어둠에 잠겼을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곳을 떠나 읍내를 향하여 가는데 발소리마저 없이 하려고 신발을 벗고 걸어갔습니다.
강을 건너고 길도 아닌 험한 곳을 달려갔습니다. 어떤 곳은 눈이 다섯 자 혹은 열 자나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제가 겨우 약속하였던 곳에 이르러 보니 신자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되어 두 번이나 읍내로 들어가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헛일이었습니다.
결국 약속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밭에 앉아 있자니까 처량한 생각이 소용들이치기 시작하여 몹시 심란해졌습니다. 연락원들이 잡힌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오지 못하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연락원들이 절실히 필요한 이때에 저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여 서울로 가자니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여비도 없고 옷도 없고, 그렇다고 중국으로 되돌아가자니 그것 역시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모셔올 길이 아주 끊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추위와 굶주림, 피로와 근심에 짓눌려 기진맥진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거름더미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고대하면서 먼동이 틀 때까지 녹초가 된 채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저를 찾아다니던 신자들이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저보다 먼저 와 있었는데 저를 만나지 못하자 되돌아갔다가 두 번째 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얼마 동안 기다려도 제가 오지 않으니까 모두 걱정을 하면서 5리나 나가서 찾아보아도 찾지 못하여 근심으로 밤을 지새운 뒤 절망하고 낙심천만하여 돌아갈까 하던 참에 저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신자 일곱 명이 말 두 필을 끌고 서울을 떠났는데 중간에 오다가 네 명은 신부님들을 영접하는 어려움과 위험 때문에 낙심하여 뒤에 떨어지고 세 명만 변문까지 왔던 것입니다. 현 가롤로(玄錫文)와 이 토마스(李在誼)와 두 명의 하인은 끝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뜬 뒤에 신자 두 명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뒤 따라오도록 남겨두고 저는 한 명만 데리고 의주를 떠났습니다.
저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30리를 겨우 걸은 다음 주막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말 두 필을 세내어 타고 닷새 만에 평양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말 두 필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던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길을 떠나 7일 만에 수도, 즉 한양에 도착하여 신자들이 마련해 둔 집에 들어갔습니다.
신자들의 호기심과 수다스러움과 위험을 염려하여 필요한 신자 몇 명 외에는 아무에게도 저의 귀국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조선에 돌아왔다는 말을 저의 어머님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당부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미 우리가 마카오로 간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귀국하는 대로 즉시 잡아 죽이도록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방안에 갇혀 있은 지 며칠이 지나니까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저를 괴롭히더니 마침내 병에 걸렸습니다. 마치 오장육부가 끊어지는 듯이 가슴과 배와 허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히 아팠습니다. 때때로 심하게 아프다가 좀 낫기도 하고, 이렇게 한 보름 넘게 앓았습니다. 저는 병을 고치기 위하여 신자 의원과 외교인의원을 청하여 그들이 주는 여러 가지 약을 먹었습니다.
지금 병은 다 나았으나 몸이 허약하여 글씨를 쓸 수도 없고 다른 것을 원하는 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한 20일 전부터는 눈병까지 생겨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련한 처지의 허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도우심과 자비를 의지하여 페레올 주교님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영접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가롤로(현석문)를 충청도로 보내어 해변에 집을 마련하라고 하였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집 한 채와 배 한척을 샀는데 그 값이 은 백 46냥이었습니다.
이제 중국 강남성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참입니다. 그러나 신자 뱃사공들에게는 미리 겁먹을까 봐 염려되어 어디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모두 신자이기는 하지만 매우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먼 바다에 나가본 적도 없고 또 배를 조종할 즐도 모르는데다 항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항해술이 능통한 것처럼 이야기하며 설득시켰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사이에 약조한 것이 있습니다. 즉 조선 배가 국경을 넘어 중국측 해안에 들어가면 중국에서 그 배에 탄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는데, 만일 조사해 보고 죄가 있을 경우에는 죽이도록 되어 있고 또 중국 배에 대하여도 조선에 오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 대한 경의와 인자하심을 기억하시는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가 무사히 강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게 해주실 줄 희망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스승님께 몇 가지 청할 것이 있는데 혹 저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신다면 컴퍼스, 먹 없이 글씨를 쓸 수 있는 검은색 철필, 세계지도, 특히 황해와 중국과 조선의 해변을 자세히 그린 지도, 그리고 눈을 보호하는 중국식 녹색 안경을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지극히 공경하을 스승님께, 무익하고 지극히 부당한 종 김해 김 안드레아 올립니다.

추신 :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斑點)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天然痘)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명확하게 적어 보내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


● 김대건 부제의 열한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4월 6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리부아 신부님께
공경하올 신부님 제가 중국에 있을 때 몇몇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로는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이 포졸들에게 자수한 것은 올바르게 행한 것이 아니었고, 또 신자들이 배반자를 제외하고 마치 신부님들을 경멸하고 저버린 사람들처럼 비난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과 신자들이 처해 있던 주변 환경이 어떠했는지를 주목하고 인식한다면 어김없이 그들의 운명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신부님들은 체포될 위험에 놓여 있었고, 또 탈출하기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박해와 굶주림에 억눌려 있었고 그들은 거의가 집도 없이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다가 체포되어 몰살당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교인과 포졸까지도 신자들을 동정할 정도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모두 신자들을 위해서 계셨고, 또 신자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모두가 신부님들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의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열성적으로 돌보았습니다. 또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보호하려고 힘껏 애썼습니다.
신자들은 가능한 한 신부님들을 숨겨드리려 하였고 신부님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까지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자진하여 포졸들에게 가셨고 또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한사코 만류하지 않았으며, 어떤 신자들은 포졸들이 오기 전에 앞질러 떠나기도 하였음을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달리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다지도 좁디좁은 왕국에서 조정은 신부님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고, 주교님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신부님들을 부르셨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에 깔려 신부님들을 수색하였습니다. 주교님은 불가피한 사정에 몰려 당신의 사랑하는 신부님들을 최후의 형장에 속히 오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신부님들은 주교님의 명령에 순명하였고 또 탈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물론 신부님들은 일시적으로 피할 수는 있었겠지만 당신들이 구하려고 온 자기 양들을 위하여 많은 환난을 무릅쓰고 죽음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판단으로는 그것은 과오가 아니라 덕행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신부님들의 명령에 순종하여 포졸들을 찾으러나갔습니다. 신부님들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당신의 제자인 유다에 의하여 넘겨졌고, 신부님들은 그들의 제자인 신자에 의하여 넘겨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죽음을 향해 가졌고, 신부님들은 주교님께 순종하시어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떠나가셨고, 신부님들은 최후의 만찬으로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양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맡기셨습니다.
이처럼 신부님들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최고의 형벌에 내맡겼습니다. 신부님들은 신자들이 사제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고 또 그들의 목숨이 귀중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은 당신들이 죽은 다음에 미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으며 목자 없는 양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장차 이리와 늑대들이 주님의 양떼를 잡아먹으리라는 것을 예견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죽음의 길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몰려와 슬픔에 젖어 목자들을 바라보면서 자기들을 고아로 남겨놓고 죽음의 길로 떠나가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어머니와 같은 애정으로 성서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그들을 위로하였고, 자기들은 웃어른의 명령으로 죽음의 길로 간다고 타일렀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자기들도 신부님들을 따라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였으나 그리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신부님들은 미사성제를 봉헌한 다음 길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양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는 더 이상 목자들을 뵐 수 없게 되었음을 통곡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이 떠나자 신자들은 비록 몸은 함께 가지 못할지라도 마음은 신부님들과 결합되어 있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정신을 가다듬어 장차 닥쳐올 사태를 기다리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포졸들은 신부님들을 보자 관례를 벗어나 부드럽게 대하였고 예의바르게 하였습니다. 관장들도 많은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대우를 잘해 주였고 감시를 하지 않았으며 어디를 가든지 허락하였습니다. 밤에도 포졸들이 신부님들을 매우 신임하여 마음놓고 편안히 주무실 수 있도록 그들은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모두 제공하였고 말에 태워 조심스럽게 끌고 갔습니다.
서울에 끌려온 신부님들은 존경하을 주교님을 뵙고 나서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문을 많이 받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잘 참아냈고 지극히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주 그리스도를 용감히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저버리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더욱 큰소리로 하느님을 증언하였고, 신자들을 신고하라는 강요를 당하였으나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또다시 참을 수 없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형벌을 극복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1839년 9월 21일에 거룩한 피를 흘려 순교함으로써 하늘나라로 개선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도 신자들은 2년 동안 박해에 시달렸습니다. 마지막 박해가 4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그 동안 신자들은 비참과 가난에 쪼들려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게 되었었을 뿐 아니라 박해와 무수한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4년 전부터 박해가 멈추었지만 아직도 평온한 상태는 아닙니다.
지금은 신자들을 죽이려는 적극적 박해는 없지만 신자들은 예전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집이라는 것이 알려지기만 하면 포졸들이 즉시 그 집을 점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당하고 난 후라 맥이 빠지고 열성이 식어 대다수가 냉담자들이 되었는데 예전과 같은 열성적 상태로 돌아올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전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점차 열성이 오르고 그 수도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배교자들이 참회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외교인들에게 설교한 사람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오류를 버리고 가톨릭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되려는 외교인들이 많지만 신자들은 박해가 무서워서 감히 자진하여 그들에게 종교를 전하려는 엄두를 감히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의 종교를 찬양하고 그 종교가 참된 종교임을 고백하면서 박해가 없었더라면 자신들도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로지 박해가 무서워서 감히 귀의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포졸들은 서로 다음과 같이 수군거립니다.
"만일 박해가 없었더라면 누구라도 송아지 새끼가 아닌 이상 천주교신자가 되기를 마다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천주교는 참으로 훌륭한 종교이기는 한데 우리가 만일 신자가 되면 우리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군. 온갖 모욕을 참아내고 언제 어디서나 겸손하여야 한다네. 자기 자신과 사물을 경시하며 모욕을 받더라도 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네."
"신자가 되면 세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니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살겠나?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고 비참할 뿐이겠지“
일반적으로 외교인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정직하다고 알고 있고 신자들의 비참을 동정합니다. 그리고 박해 때는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어떤 좋은 것이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면 "필시 천주교 신자의 소행일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외교인들끼리도 어떤 것을 올바로 행하면 "자네도 천주교 신자인가? 왜 그렇게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하나?"라고 농담을 합니다.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을 죽인 왕후(貞純王后)를 제외하고는 조선에서는 종교를 적극적으로 박해한 임금님이 없었습니다. 모든 박해는 벽파(僻派) 대신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왕들은 흔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벽파의 뜻을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허락하였을 따름입니다.
1838년에 대왕대비(순원왕후)가 바로 그러하였고 그 다음 몇 해 동안의 마지막 박해 때도 그러하였습니다. 대왕대비는 대신들의 뜻을 감히 반대하지 못하였고 마음속으로는 반대하면서도 대신들이 신자들을 가혹하게 박해하고 신부님들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김 대비의 동생 김두근이 살아 있었더라면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조선 안에 외국인 신부님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신자들을 박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비신자이고 궁중의 2품 고관인 김정의와 순교자 유 아우구스티노(유진길)와 매우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마침내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도 천주교에 가담하였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838년경에 중병을 않고 정신을 잃었으며 183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벽파는 기회를 잡게 되었고 박해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부제의 열두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4월 7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조선 왕국의 대신들과 관장들 사이에는 어떤 계통, 즉 파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공연한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 하나는 벽파(僻派)라 하고 하나는 시파(時派)라 하는데 서로 반대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이 두 파가 서로 대립하는 근본 이유는 각각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이 당파 싸움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으나 지금은 가법게 볼 수없는 문제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파 사이에는 시기와 비난, 논쟁과 학살 등이 연출되어 서로 도발하고 고발하여 내몰고 귀양 보내기에 급급합니다.
그들 당파는 다시 노론(老論), 즉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의 구별이 있어 각각 다른 당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노론은 벽파와 손잡고, 남인은 시파와 손잡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그렇지 아니한 예도 있기는 있습니다. 천주교는 시파한테서는 용인되고 있으나 벽파한테서는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벽파는 천주교를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김 대왕대비, 즉 현재 임금님의 조모는 시파에 속하고 젊은 대비, 즉 현재의 임금님의 모친은 벽파에 속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벽파입니다. 그리하여 벽파가'시파를 반대하여 궐기하려고 원하는 때는 그들의 모든 의견을 배척하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무죄한 천주교 신자들을 근절할 행동을 취하므로 여러 번 박해가 일어나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지금 천주교의 제일 큰 적은 조만영(趙萬永)인데 그는 젊은 대비의 부친입니다. 그가 오늘날 이 나라 정치의 최고 권력을 잡고 있으며, 그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은 영의정이고 그의 아들(조병규)은 병조판서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박해는 대부분 조만영과 조인영의 계획으로 벌어졌는데, 신자들을 가혹하게 박해하고 신부님들을 죽이라고 명한 것도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신부님들을 죽이고 나서는 프랑스인들이 군함을 타고 들어와 복수를 할까 봐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나라에서 무고한 피를 너무 많이 흘리게 하였으므로 필연코 전쟁이 일어나 온 나라가 큰 재앙을 입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떠들어대고 있으며, 지금은 전쟁을 기다리기까지 합니다.
조선의 국법대로 하면 외국인들은 죽일 수가 없고 오히려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인 · 달단인 · 일본인들은 필요한 것을 주어 반드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들을 죽인 것은 확실히 종교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신부님들이 조선에 온 것은 교황님과 프랑스 왕이 파견해서 온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을 죽인 후에 무서워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졸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 조정은 신부님들을 죽임으로써 프랑스 왕을 모욕하는 불경죄를 범한 것인데, 그들은 일찍이 영국인으로부터 서양의 왕들은 자기 백성이 피살된 경우에는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번민하던 우리나라 대신들은 여러 척의 함선

이 지나간다는 보고를 받고 프랑스인들이 보복하러 온 것으로 알고불안에 떨었으며, 또한 백성들도 서양 함선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영국 함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프랑스 측에서 이미 여러 해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프랑스라는 나라는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 무서워할 바가못 되는 나라라는 근거 없는 그릇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모든 공포를 떨치고 또다시 신부님들을 죽일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만일 대신들을 저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면 신부님들이나 우리 신자들이나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실상 왕은 이런 일에 대하여 대체로 무죄합니다. 하느님께서 섭리하여 주소서!
만일 프랑스 군함이 조선에 와서도 신부님들을 살해한 사건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신자들의 처지가 더욱 참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정부에서 우리가 귀국하는 대로 사형에 처할 작정으로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그들 가까이 있어도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경계도 충분하지는 못한 듯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대신들이 제가 조선에 돌아온 줄 알게 되면 즉시 사방으로 수색할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순교한 다음에도 신자들은 2년 동안 박해를 더 받았습니다. 4년 전부터는 안온한 상태에 있는데 신자들의 기운을 회복시키고 외교인들을 입교시키며 모두를 완성시켜 줄 선교사 신부님들을 하루빨리 조선에 모시기를 모두가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자의 수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으며 신부님들이 순교한 후 오늘까지 줄어들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증가하여 최소한 만 명은 될 듯합니다. 외교인들은 우리 종교의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께로 귀화하는 사람이 매우 많으며 그 중에는 몇 마디 권고만 듣고 즉시 입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전부터 우리 종교의 진리를 들어보고자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지금 누가 용감히 나서서 그들에게 전교만 하면 종교를 수용할 사람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신자 10명은 아직 감옥에 갇혀 있고, 5명은 귀양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왕의 조모 김 대왕대비는 아직 생존해 있으나 여러 가지 고통으로 번민하여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으려고 불교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대왕대비가 사망하면 우리 신자들에게 큰 환난이 닥쳐을 것입니다. 왕은 건강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답니다. 대신들은 어느 날 밤 회의를 열어 왕을 옥좌에서 몰아내고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고 모의를 하였다 합니다.
왕은 19세 된 젊은이지만 상당히 신중하고 얼굴에는 병으로 인한 흔적이 뚜렷하나 코가 높고 인물은 그다지 못생기지 않았다 합니다. 먼젓번 왕비가 사망한 후 15세 된 홍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합니다.
우리 교회를 박해하는 대신 조만영과 조인영은 아직 살아 있어서 대단한 권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비신자인 2품 대신 김정희(金正喜) 판서는 아직 귀양에서 풀려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백성들은 평화를 누리고 배불리 먹고 지내면서 전쟁 소문을 퍼뜨리기를 일삼고 있습니다.
배반자 김여상은 아직 귀양살이를 하면서 첩과 함께 살아 있다고 하는데 그 역시 많은 혹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포졸들과 관장들은 그를 미워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를 매질하면서 "이놈아, 너는 유다보다 더 악한 놈이다. 유다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러 오신 예수님을 배반하였다 하거니와 이놈아, 너는 살려고 조선에 온 신부님들을 배반하여 죽였으니 너는 인간도 아니다. "라고 엄히 꾸짖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눈병이 낫지 않았고 그 동안 중병에 걸려 몹시 않았으나, 요새는 힘없는 머리를 겨우 쳐들고 있을 정도로 원기가 조금 회복되고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은 태산같이 많으나 몸은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 마음은 설치지만 활동은 미미합니다.
현재를 위해서나 장래를 위해서나 이곳 형편을 위해서나 북방의 길을 열어놓을 일이나 강남으로 출발할 일을 생각하면 제가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병으로 허약해진 몸이 일을 행하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병중에 무능해진 저는 다만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저는 지금 14세 된 학생 두 명을 가르치고 있으며, 또 다른 아이 두 명을 지명하여 두었으나 아직 저에게로 오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제가 병중에 있으나 가능한 대로 강남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출발할 예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금년에 메스트르 신부님과 토마스(최양업 부제)를 영접하기 위하여 북방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중국 함선이나 서양 함선 편으로 무슨 물건이든 조선에 보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임을 신부님께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도처에 군졸을 배치하여 경비하고 있습니다. 외국 함선이 오는 때 혹시라도 그들과 연락을 취하는 조선 사람이 있을까 하여 감시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 조선 종이 20장이 들어 있는 봉투, 조선 그림 석 장이 들어 있는 작은 봉투, 병풍이라고 하는 여덟 폭으로 된 그림, 밤에 사용하는 놋그릇(요강), 신부님들의 유해가 들어 있는 누런 주머니 세 개, 조선 지도, 빗 제 개와 빗을 소제하는 기구, 붓을 쓸 때 붓끝만 풀어서 쓰는 붓 네 자루, 돗자리 하나를 보내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가장 순명하고 무익한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부제의 열세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6월 4일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공경하올 신부님,
저는 작년에 조선 대목구의 감목이신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주교님의 선교지인 조선에 파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조선 안의 준비를 끝내고 11명의 신자와 함께 배로 상해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님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대단히 분주하여 많은 것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신부님께 조리있게 편지를 써서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조선인 학생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부제의 열네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6월 4일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페레올 주교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지극히 존엄하신 주교님을 변문에서 하직한 후 저는 저넉 무렵이 되어서야 의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마중나온 연락원들을 먼저 보내고 저는 혼자 밤중에 강을 건너 관문을 통과하였는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닷새를 소비하여 평양이라는 도시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서울까지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 신자들로부터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피곤한 일이 겹쳐 여러 차례 병을 앓았습니다.
지금 저는 11명의 신자와 함께 배를 타고 상해에 와 있으며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일로몹시 분주하여 많은 것을 보고 드리지 못합니다.
지극히 존엄하신 주교님께, 조선인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열다섯 번째 편지는 김대건 부제가 6월 4일에 상해에 도착한 후 예수회의 고틀랑 신부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편지는 유실되었고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만 고틀랑 신부의 1845년 7월 8일자 서한에 나타나고 있다.)


● 김대건 부제의 열다섯 번째 편지 (유실)
발신일 : 1845년 6월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예수회의 고틀랑 신부


● 김대건 부제의 열여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7월 23일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을 신부님,
저는 모든 준비를 끝낸 후 11명의 신자와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이들 가운데 4명만 사공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바다를 구경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비밀리에 급히 추진하다 보니 유능한 사공을 구할 수도 없었고 그 밖의 요긴한 물건들도 장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음력 3월 24일에 돛을 펴고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신자들은 바다를 보고 대우 놀라면서 수군거렸으나 감히 저에게는 묻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제가 하는 일에 대하여 질문하지 말라고 미리 금지해 두었던 때문입니다.
처음 하루 동안은 순풍을 만나 무사히 항해했으나 그후 갑자기 비를 동반한 폭풍우가 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폭풍우로 말미암아 강남과 상해에서는 30척 이상의 배가 유실되었다 합니다.
우리가 탄 배는 바다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작은 배였는데 폭풍우가 점점 심해지자 파도 때문에 몹시 까불리고 무섭게 내팽개쳐져서 거의 침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 뒤편에 끌고 오던 종선 줄을 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위험이 여전히 계속되므로 두 개의 돛대를 베어버리고 마침내 식량까지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가 조금 가벼워지기는 했지만 폭풍이 부는 대로 산더미 같은 파도에 휩쓸려 요동을 쳤습니다.
신자들은 3일 동안 먹지 못하여 극도로 탈진하였고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보고 절망하여 "이제는 다 끝났다. 도저히 살아날 수가 없겠다." 하고 서글피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 상본을 내보이면서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로 가능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저 역시 신병중이라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서 일을 보았고 마음속의 두려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으뜸 사공으로 채용한 사람은 벌써부터 영세 준비를 하고 있던 외인이었기에 저는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거센 물결에 키가 부러져 떠내려갔고 배는 폭풍과 파도에 까불리며 대양으로 떠밀려 갔습니다. 그래서 물결을 막으려고 돛들을 묶어가지고 배 뒤에 달아매어 물에 띄었는데 그것마저 그만 줄이 끊어지면서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배 밑에 깔았던 나무토막을 멍석에 싸 묶어 띄웠으나 그것 역시 파도에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우리의 희망을 오직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의탁하고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비도 그치고 풍파도 약해져 있었습니다. 하루가 지나자 우리는 기운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모든 이에게 음식을 먹고 주님 안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라고 명했습니다.
이렇게 원기를 회복한 후 우리는 항해를 계속할 준비를 하려 하였으나 돛대도 없고 돛도 없고 키도 없고 종선도 없어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영화로우신 우리 동정 성모님께 깊이 의탁하고, 배에 남아 있던 나무를 있는 대로 다 거둬 돛대와 키를 만들었습니다. 대략 닷새 동안 역풍을 거슬러 항해하였더니 우리는 강남성 해안에 도착하였고 멀리 산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돛대도 변변치 않고 항해하는 데 필요한 물건도 부족하여 상해까지 갈 수가 없어서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구원을 청하거나 적어도 길이라도 물어보고 싶었으나 종선이 없어 그들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우리한테 오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보고 피해 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인간의 구원을 바랄 수가 없게 되어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산동 배 한 척이 나타났는데 우리를 보고서는 두려워하여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저는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다가오려 하지 않았으나 이윽고 측은한 마음이 생겼는지 우리한테로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배에 올라가 선장과 인사하고 나서 우리를 상해까지 인도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의 설명도 간청도 들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와 함께 산동으로 가서 관례에 따라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되돌아가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북경을 거쳐 귀국하고 싶지는 않고 배를 고치기 위해 반드시 상해로 가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돈 천 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듣고서야 겨우 저의 청을 승낙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배를 그 배에 달아매고 대략 8일 동안 줄곧 역풍을 거슬러가다가 또 폭풍우를 만났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끌고 가던 선장의 배는 파선하여 한 사람만 살고 그 외에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 폭풍우가 지나고 다시 항해를 하는데 이번에는 해적들이 우리에게 달려들며 선장을 향하여 "조선 사람들의 배를 끌고 가지 말라. 우리가 그들을 약탈하련다."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선장에게 그들을 폭파시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자 해적들은 우리를 떠나 달아나 버렸습니다.
약 7일 후에 오송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중국 관장이 경찰관들을 우리에게 보내어 어디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왔느냐고 심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조선 사람들인데 큰 폭풍우를 만나 여기까지 표류하여 왔고 상해로 가서 배를 수리할 작정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 영국 함선의 함장들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우리는 조선 사람들이며 선교사 신부님을 찾아왔노라고 설명하고는 우리를 중국인들로부터 보호해 주고 또 영사관으로 안내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친절했고 저의 청을 기꺼이 승낙할 뿐 아니라 포도주와 고기도 내어주고 또 저를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오송구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그곳 관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관장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우리 사정을 황제께 보고하여 육지로 조선에 되돌려 보내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두 나라 사이의 관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육지로 해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여기에 온 사실을 황제께서 아시게 되는 것도 원치 않으니 보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우리 사정을 황제께 보고하든지 말든지 우리에게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배를 수리한 다음에 조선으로 되돌아갈 터이니 아무 염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우리가 다만 귀국 해안에 상륙해서 이 지방 땅을 발고 이 지방 물을 마시는 것뿐임을 알고 계시면 넉넉하겠습니다. 나는 오직 완전한 자유를 가지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상해의 관장에게 조선 배한 척이 수리하러 그곳으로 간다고 통지하여 주십시오. 우리 배 때문에 상해의 관장이 조금이라도 귀찮거나 걱정되는 일을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곤란하거나 불안한 일을 당하지 않고 상해에 머물러 있게 허락하여 주도록 그 관리에게 편지를 써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중국 관장은 제가 영국인과 교제하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조선 사람인데 어떻게 영국인들과 절친한 친구처럼 지내고 영국말까지 알아듣는가." 하고 말하면서 대단히 놀라워하였습니다.
오송구에서 출범하여 상해 항구로 들어갔습니다. 두 명의 영국인들이 와서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배를 중국인 안내자에게 맡기고 영국인들의 종선을 타고 상해 시가지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영국인들에게 저를 영사에게로 인도해 줄 안내자를 구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아서 존 엠슨이라는 영국인이 프랑스어를 할 줄 알므로 저를 위하여 영사에게 편지를 써주었습니다.
저는 영사관에 들어가 매우 환대를 받고 우리가 필요한 모든 사정을 영사에게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를 중국인들의 손에서 보호하여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님이 우리가 갈 거라고 영사에게 미리 말씀해 두셨고, 보호해 주도록 부탁해 두셨기 때문에 영사는 벌써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중국인 신자 집으로 가서 이틀 동안 유숙하고 있는데 강남 전교지의 전교사인 고틀랑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그 신부님에게서 5백10원을 받았는데 그 중에 4백 원은 우리를 인도해 준 중국인 인도자에게 주고 약 30원은 신자들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는 동안 상해의 중국 관장이 경찰관을 우리 배에 보내 여러 가지 질문을 한 후 파수꾼을 두어 밤에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시장도 몸소 경찰관을 거느리고 와서 배를 보고 돌아가더니 쌀 20말과 고기 20근을 보내왔습니다.
제가 배로 돌아오니 신자들이 당황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국 관장이 여러 가지로 심문하고 또 수천 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던 까닭입니다. 중국 관장은 제가 배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다시 경찰관을 보내어 무슨 이유로 여기 왔으며 각 사람의 성명, 연령, 거주지 등을 조사하였습니다. 우리는 간단하게 대답을 한 후 중국 관장에게 더 이상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쌀과 고기를 돌려보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한두 번 중국 관장을 면회하였습니다.
상해의 관장은 우리에 대한 모든 사실을 송광부의 상관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관은 자기가 저를 알고 있으며(아마 제가 세실 함장과 함께 있었을 때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또한 우리가 마음대로 상해에 체류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답서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한갓 호기심으로 너무나 많이 몰려들었으므로 저는 작대기로 그들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제게 너무 무례하게 행동한 경찰관을 엄히 책망하였는데, 그들은 관장한테서도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상해 주민들은 저를 큰 인물로 여기고 있으며 중국 관장은 제가 영국인과 친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정체불명의 이상한 존재라 하여 많은 의혹을 품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 번은 관장이 경찰관을 보내어 우리보고 언제 떠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나는 배를 고치기 위하여 여기에 더 머물러 있어야 하오. 그뿐 아니라 당신들의 상급 관장한테서 들은 말인데 얼마 후에 세실 함장이 여기 온다고 하니 나는 그를 만나보기 위해서도 더 머물러 있어야 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중국 관장은 우리 때문에 관직을 잃을까 봐 두려워 우리가 출발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모든 사정을 다 설명드릴 필요도 없거니와 또한 그럴 시간도 없어서 이만 줄입니다. 이미 배는 수리하였고 지금은 종선을 만드는 중입니다. 저희 모두는 주님의 은혜로 잘 있습니다. 조선 대목구장 주교님의 도착을 날마다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경하올 베지 주교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길에서 병이 나셨다고 합니다. 남경에서는 작은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영국 영사도 안녕하시고 우리 사정을 지극히 잘 주선해 주고 계십니다.
사공들과 조선 선교지를 위해 수고를 많이 한 신자들에게 선사하기위해 상본과 패를 보내주시기를 신부님께 청합니다. 특히 성학자 토마스, 성 가롤로, 우리 주님의 양부이신 성 요셉, 성 요한 사도의 상본과 십자고상 상본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부님께 드리려고 조선 물건 몇 가지를 가지고 왔으나 지금은 보내드릴 적당한 방법이 없어 주교님이 오실 때 보내드릴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선교지로 보내실 물건들은 모두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여러 신부님들께 편지하실 때 저의 인사도 전해주시 기를 바랍니다.
벌써 신부님께 편지를 올렸어야 마땅한데 여러 가지로 분주하게 지내느라 못 올렸습니다. 더구나 고틀랑 신부님이 여기 있는 보고서를 한 번씩 읽어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상서가 늦었습니다.(김대건 부제가 가지고 온 보고서는 그가 서울에서 1845년 3월과 4월에 쓴 조선 초기 교회사와 1839년 박해 때 순교자들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에 가서 팔 수 있는 물건들은 여러 가지 색깔, 특히 흰색 서양포목과 여러 가지 색깔의 명주, 여러 가지 색, 특히 붉은색과 푸른색의 중국 포목과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곳 신자들이 모두 신부님께 인사드립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하고 무익한 아들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추신 : 1845년 7월 23일 저는 페레올 주교님께 짧은 편지를 올렸습니다. 만일 주교님이 거기(마카오)에 안 계시고 출발하셨다면 신부님께서 그 편지를 읽으시고 원하시는 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 김대건 부제의 열일곱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7월 23일
발신지 : 상해
수신인 : 페레올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지극히 존엄하신 주교님께 벌써 편지를 올렸어야 했습니다마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분주하여 편지를 올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는 영국 영사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공경하올 주교님의 분부를 받고 조선에 파견된 후 저는 하느님의 은혜로 무사히 입국하여 서울에서 신자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저는 병에 걸려 여러 차례 심하게 앓았습니다. 신자들은 지금 박해를 받지 않고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마는 목자가 없어 탄식하고 있습니다. 신자수가 나날이 증가되고 열심도 커지며 배교한 사람들도 다시 회개하여 바른길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외교인들도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오류를 버리고 참 하느님께로 회두하는 사람이 많으며, 외교인 사이에 천주교를 가장 좋게 여기는 여론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신자수는 최소한 만 명으로 추산되고 순교자 수는 처음부터 8백 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오늘날 실제로 적극적 박해를 당하고 있지는 않으나 날마다 즉을 위험에 처하여 있으며 참으로 가난하고 참혹한 환난 가운데 있습니다.
주교님의 거처하실 집을 한 채 사서 어느 신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강남으로 오기 위하여 범선 두 척을 샀는데 한 척은 좀 큰 것이고 또 한 척은 작은 것이었습니다. 작은 배는 폭풍우로 바다에서 잃었습니다.
조선을 떠나 강남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렀고 두 번이나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제가 조선에서 출발할 때 데리고 온 신자들의 부모나 아내들은 그들의 행방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강남 근처 바다에서 해적을 만났으나 동정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받아 감히 우리를 약탈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오송구와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영국 영사와 영국인들이 우리를 매우 친절하게 후대하고 진심으로 보호해 주었습니다.
중국 관장은 우리에게 육지로 해서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관례에 따라 우리가 도착한 사정을 황제에게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반대하여 그리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지금은 그 중국 관장도 저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곳에 마음대로 체류하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영국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합니다. 또제가 중국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저를 중국인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국 영사는 자기가 주교님이 보내신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저더러 주교님께 보고 드리라고 하면서 편지를 저에게 건네주었습니다.(그가 통역 없이 저에게 이 말을 하였으므로 자는 그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하였습니다.)
모든 사정을 명확하고 자세하게 주교님께 상서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지금 제 주변에 할 일이 너무나 많이 널려 있고 또 머지않아 주교님을 만나 뵙겠으므로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리부아 신부님께 올린 편지에는 좀더 자세히 적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주교님이 오시기만을 날마다 고대하고 있습니다.
범선에는 물건을 둘 만한 자리가 넉넉하니 주교님께서 오실 때 가져올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오시기를 바랍니다. 조선에서 팔 만한물건은 서양 포목, 천, 비단과 같은 것들입니다. 조선의 은화는 그 모양이 조금 가늘고 기다랗습니다. 은덩이는 모양이나 크기에 상관없이 통용됩니다.
조선의 대신들은 프랑스 왕에 의하여 조선에 파견되었다고 여기는 프랑스 신부님들을 살해한 후에 혹시 프랑스인들이 보복하러 오지나 않을까 하여 몇 해 동안 무서워했습니다. 프랑스 왕이 파견한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프랑스 왕을 모욕하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 프랑스인들이 보복하러 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은 다시 대담해져서 또다시 신자들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베지 주교님은 길에서 병환이 나셔서 아직 돌아오시지 못했습니다. 고틀랑 신부님으로부터 5백80원을 받았습니다.
공경하올 주교님께 이곳 신자들이 인사를 드립니다.
존엄하신 주교님께, 순명하고 무익한 아들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신부의 열여덟 번째 편지
발신일 : 1845년 11월 20일
발신지 : 서울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우리는 9월경에 강남을 출발하였습니다. 바다에서 여러 차례 폭풍우로 시달렸고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키가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배가 파손되지 않도록 돛대를 베어버리고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거센 역풍으로 우리는 제주도까지 떠내려갔습니다. 그후 여러 날 걸려 강경이라는 항구에 도착하였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무런 재앙 없이 신자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과 공경하올 다블뤼 신부님은 주님 안에 평안하시고 조선말을 공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토마스 부제를 영입할 여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박해한 왕과 대신들은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신자들은 현재로서는 평화롭게 지내고 있으나 또 다른 박해가 일어난다는 소문이 신자들을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금년 음력 7월경에 영국 함선 한 척이 제주도에 왔습니다. 그때 대신들과 백성들은 살해된 신부님들의 피를 보복하려고 왔다고 생각하며 떨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에 서양 함선이 자주 드나드는 것은 신자들에 대한 외교인의 증오심을 자극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서양 사람들이 접근해 오는 것은 신자들이 그들을 초청하고 그들과 내통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외교인은 우리가 강남에 갔다 온 것을 의심하고 탐사하면서 나쁘게 말하고 있습니다.
표현력이 부족한 저는 감히 많은 것을 적어드리지 못합니다.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과 공경하올 다블뤼 신부님께서 스승님께 편지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계획과 원의로 밖에는 한 일이 거의 아무것도 없으므로 보고드릴 것이 많지도 않습니다.
또한 지극히 좋으신 공경하올 리부아 신부님과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진심으로 모든 행복과 성공을 기원합니다.
공경하올 신부님, 기도와 미사성제 가운데 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하고 무익한 종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12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8-9번째 (소팔가자에서) 12·12·16 4823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0-18번째 (서울/상해에서) 12·12·16 4281
10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9-21번째 (옥중에서) 12·12·16 5395
9 최양업   최양업 신부의 서한 일람표 12·12·16 4095
8 최양업   최양업 신부의 편지 : 1-6번 째 (마닐라/소팔가자/심양/홍콩/상해에서) 12·12·16 4176
7 최양업   최양업 신부의 편지 : 7번 째 (도앙골에서) 12·12·16 4461
6 최양업   최양업 신부의 편지 : 8번 째 (절골에서) 12·12·16 6069
5 최양업   최양업 신부의 편지 : 10-12번 째 (동골/배론/소리웃에서) 12·12·16 4501
4 최양업   최양업 신부의 편지 : 13-14번 째 (불무골에서) 12·12·16 3695
3 최양업   최양업 신부의 편지 : 15-16번 째 (오두재에서) 12·12·16 4292
2 최양업   최양업 신부의 편지 : 17-18번 째 (안곡에서) 12·12·16 3419
1 최양업   최양업 신부의 편지 : 19번 째 (죽림에서) 12·12·16 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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