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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103위 성인 | 124위 복자 | 김대건 | 최양업 | 2차 시복대상 133위 | 2차 시복대상 81위 |
103위 성인 :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가]
 paxkorea    | 2013·01·12 22:38 | HIT : 3,213 | VOTE : 604
103위 성인 : [가]

[가]

49. 고순이 바르바라  (부인, 1839.12.29, 서소문 밖)
고순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고광성(高光晟)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교우인 박종원(朴宗源)과 혼인하여 3남매를 두고, 모범 가정이라고 칭찬을 들으며 살았다. 또한 회장인 남편을 도와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병약자를 간호하는 등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봉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10월 26일 남편이 먼저 체포되고, 그 이튿날 고순이도 체포됨으로써 포청에서 남편과 만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형조에서도 남편과 함께 고문을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과 함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고순이는 12월 29일 남편 박종원보다 한 달 먼저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91. 권득인 베드로  (상인, 1839.05.24, 서소문 밖)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권득인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읜 뒤 혼인하였다. 얼마 동안은 약장사를 하는 형과 함께 살다가 분가하여 성패(聖牌)와 성물(聖物)을 만들어 팔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항상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촛불을 켜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권득인은 1839년 1월 16일 아내, 처남, 어린 자녀 등 4명의 가족 그리고 김로사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그의 신앙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뒤에 가족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자 권득인은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35세였다. 

37. 권진이 아가타  (부인, 1840.01.31, 당고개)
서울에서 태어난 권진이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한영이와 함께 입교하였다. 13세경 혼인하였으나 남편이 너무 가난하여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丁夏祥)의 집에서 살았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입국한 뒤부터 신부의 시중을 들었는데, 유 신부가 조선을 떠나게 되자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해 7월 17일, 같이 살던 한영이,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옥살이 중 한 차례 도망쳤던 죄로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2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78. 권희 바르바라  (부인, 1839.09.03, 서소문 밖)
이광헌의 부인이며 이 아가타의 어머니인 권희는 1817년경 남편과 함께 입교하였다. 박해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회장을 맡은 남편을 도와 주교와 신부들을 맞아들였고 또 교우들을 권면하여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4월 7일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수차의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다. 특히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끝내 모정을 억제하고 온갖 유혹과 형벌을 견디어 냈다. 이렇게 처참한 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47. 김 데레사  (과부, 1840.01.09, 옥사)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이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 요셉과 혼인하였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자 가난하게 혼자 살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1일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丁夏祥)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김 데레사는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 내고, 옥에서 만난 이광헌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44세의 나이로 이 아가타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59. 김 루치아  (과부, 1839.09.??, 옥사)
김 루치아는 서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구였다. 그래서 ‘꼽추 루치아’로 불렸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결국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살면서 병자들을 돌보며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성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나이가 많아(71세) 형벌은 받지 않았으나 온갖 교활한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김 루치아는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마침내 9월 어느 날 포도청에서 기력이 다해 옥에서 죽음으로써 순교하였다. 

81. 김 루치아  (동정, 1839.07.20, 서소문 밖)
동정 순교자 김 루치아는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4세 때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고, 부모를 여읜 뒤로는 자신을 받아 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천진한 태도와 한결 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 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 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89. 김 바르바라  (과부, 1839.05.27, 옥사)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 바르바라는 13세경 서울로 올라와 교우 황 마리아의 집에서 식모로 생활하며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동정으로 살고자 결심하였으나 혼기가 차자 부모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외교인과 혼인하여 남매를 두었다. 혼인한 지 15년 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딸 하나만을 데리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3월 김 바르바라는 몸 붙여 살던 집에서 집주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가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다. 3개월 옥살이 끝에 5월 27일 굶주림, 기갈, 염병 등으로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35세였다. 

87. 김 로사  (과부, 1839.07.20, 서소문 밖)
과부가 된 뒤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친정 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는 1839년 1월 16일 권득인(權得仁)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을 때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이시라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때 나이는 56세였다.

103.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1846.09.16, 새남터)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33. 김성우 안토니오 (회장, 1841.04.29, 옥사)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에서 부유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하였고, 열렬한 신앙으로 전교 활동을 펼쳐 자신이 사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세례를 받고 서울로 이사한 뒤 자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인으로 밀고 되었으나 미리 피신하였고, 고향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 체포되었다. 그러나 김성우도 이듬해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감옥에서도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여 2명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옥살이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대를 맞고 이튿날 교수형을 받아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86. 김성임 마르타  (과부, 1839.07.20, 서소문 밖)
인천 부평(富平)에서 태어난 김성임은 혼인에 실패한 뒤 서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점쟁이와 재혼하였다. 이 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하던 김성임은 1839년 4월 11일 자신이 몸 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한 뒤 이미 체포된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99. 김아기 아가타 (과부, 1839.05.24, 서소문 밖)
김아기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다.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여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金業伊), 한아기(韓阿只)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아기는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 신앙을 고백하였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다음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 밖에 모르는 김아기가 왔다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아기는 형 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3세였다.

96. 김업이 막달레나 (과부, 1839.05.24, 서소문 밖)
김업이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동정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권유로 혼기에 이르러 교우 청년과 결혼하였다. 중년이 되어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와 함께 애고개(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
노모에게 순종하는 좋은 표양과 해박한 교리 지식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하며, 순교할 결심으로 살아가던 김업이는 1836년 10월 김아기(金阿只), 한아기(韓阿只)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 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66세였다. 

66. 김 율리에타  (궁녀, 1839.09.26, 서소문 밖)
동정 순교자인 김 율리에타는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모는 냉담하여 낙향하였으나, 김 율리에타는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 동안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궁에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서 일을 해 주며 품삯을 모아 집을 마련하고, 혼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늘 언행에 조심하였으며 그래서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불렸다. 기해박해가 있던 1839년 7월에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27. 김임이 데레사  (동정녀, 1846.09.20, 옥사)
동정 순교자 김임이는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7세 때 이미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뒤 신앙 생활에 전념하였다. 20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오빠와 함께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였고,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이문우의 양모 오 바르바라의 집에서 5년 동안 살다가 1845년 김대건 신부의 집에 하녀로 들어갔다.
이듬해 5월 김 신부가 체포되자 당시 회장이었던 현석문은 김 신부의 집에 남아 있던 여교우들을 새 집으로 피신시켰는데, 7월 11일에 포졸들이 새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하여 현석문, 이 아가타, 정철염 등과 함께 체포된 그는 9월 20일, 매를 심하게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84. 김장금 안나   (과부, 1839.07.20, 서소문 밖)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김장금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과 친하게 지냈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마침내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63. 김제준 이냐시오 (회장, 1839.09.26, 서소문 밖)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아버지로 충청도 면천(沔川)땅 솔뫼에서 태어났다. 1814년에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와 큰아버지의 권면으로 입교한 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무렵 나 베드로(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순성(金順性) 일당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60. 김효임 골룸바  (동정녀, 1839.09.26, 서소문 밖)
동정 순교자 김효임은 서울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뒤 전 가족이 입교하고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김효임은 두 여동생과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39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두 자매는 포청에서 이른바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 벗긴 채 남자 죄수 방에 넣어졌으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남자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김효임은 형조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74. 김효주 아녜스  (동정녀, 1839.09.03, 서소문 밖)
언니 김효임(金孝任)과 같이 동정 순교자인 김효주는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뒤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로 이사해 살았다. 아버지를 여읜 뒤 온 가족이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언니 김효임, 동생 김 클라라와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는 아름다운 덕행과 극기로써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5월 3일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형조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1839년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32 최양업   증거자 최양업 신부 ‘가경자’로 선포 16·05·13 1488
31 2차 시복대상 81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 심사, 본격 가동 15·08·27 1530
30 124위 복자   124위 한국 순교 복자 호칭 기도 15·05·10 1809
29 124위 복자   124위 복자 124위 초상 14·12·15 2079
28 2차 시복대상 81위   2차 시복대상자 :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13·07·04 2859
27 2차 시복대상 133위   2차 시복대상자 :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07·04 3095
26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명단 13·01·12 4802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가] 13·01·12 3213
24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나∼사] 13·01·12 3473
23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아] 13·01·12 3261
22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자∼하] 13·01·12 3043
21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기도문 13·01·12 3208
20 124위 복자   하느님의 종 125위 명단 13·01·12 4342
19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가] 13·01·12 5348
18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마∼사] 13·01·12 3437
17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아] 13·01·12 7345
16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자∼하] 13·01·12 4167
15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서한 일람표 12·12·16 3738
14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3번째 (마닐라/주산/상해에서) 12·12·16 3919
13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4-7번째 (요동 백가점에서) 12·12·16 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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