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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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103위 성인 | 124위 복자 | 김대건 | 최양업 | 2차 시복대상 133위 | 2차 시복대상 81위 |
103위 성인 :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나∼사]
 paxkorea    | 2013·01·12 22:31 | HIT : 3,473 | VOTE : 761
103위 성인 : [나]∼[사]

[나]

31. 남경문 베드로  (회장, 1846.09.20, 포청옥)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남경문은 20세 때 교우 처녀 허 바르바라와 혼인하였는데, 큰 병에 걸려 대세를 받고 회복된 뒤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여 석방되고 나서는 첩까지 거느리고 3년 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대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신 다음 과거의 죄를 보속하고자 극기하고 인내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교우들에게 순교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임성룡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남경문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마침내 9월 20일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92. 남명혁 다미아노 (회장, 1839.05.24, 서소문 밖)
서울에서 태어난 남명혁은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더욱 열심히 살아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신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방문하였으며 또 ‘성의회'(聖衣會)라는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신자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 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그러나 남명혁은 모든 고통을 참아 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님을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광헌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리기를 바랐던 남명혁은 한창나이인 38세에 자신의 뜻대로 순교하였다.

67.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회장, 1839.09.26, 서소문 밖)
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남이관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趙曾伊)와 혼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그는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귀양 갔다가 30년 만인 1832년에 풀려 나와 이천(利川)에 있는 처가에서 살았다. 그 뒤 상경하여 처가의 인척인 정하상(丁夏祥)의 신부 영입 운동을 도와 1833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입국시키고, 그에게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뒤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처가가 있는 이천으로 내려가 숨었으나 9월 16일에 체포되었다. 김제준과 함께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의금부로 이송되었고, 여기에서 유진길(劉進吉), 정하상과 함께 신문을 받고,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6일 남이관은 8명의 교우와 함께 6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19. 남종삼 요한 (승지, 1866.03.07, 새남터)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忠州)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꺼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 이유일(李惟一)등과 논의 하여 영불(英佛)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李先伊)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6차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다]

14. 다블뤼 안토니오  (제5대조선교구장주교, 1866.03.30, 갈매못)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양 떼를 위하여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 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21. 도리 헨리코 (신부, 1866.03.07, 새남터)
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김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부임하였다. 순교하는 날까지 운명을 함께한 서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여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손골에서 지내는 동안 교우들이 자신을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에 김씨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신의 소원대로 입국한 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동료 사제들과 함께 27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마]

71. 모방 베드로   (신부, 1839.09.21, 새남터)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45. 민극가 스테파노  (회장, 1840.01.30, 옥사)
민극가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뒤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이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 7년 뒤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극가는 집을 나와 서울 경기 지역을 전전하며 교리 서적을 팔아 생활하였다. 또 어디서나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 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 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하였거나 마음이 약해진 교우들에게 신앙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바]

62. 박봉손 막달레나  (과부, 1839.09.26, 서소문 밖)
서울에서 태어난 박봉손은 15세쯤에 시골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과 시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계모 김 체칠리아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친정에는 여러 교우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어 늘 번잡하였으나 박봉손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궂은 일과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초 외삼촌과 함께 체포되었다. 박봉손은 형관에게 “주님을 위하여 죽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침내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98. 박아기 안나 (부인, 1839.05.24, 서소문 밖)
강원도 강촌 출신의 박아기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였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하였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아기는 남편, 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남편과 큰아들은 심한 고문으로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아기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모진 고문을 이겨 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배교하고 가족들에게 돌아가라는 형관의 갖은 유혹과 고문에도 박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7세였다. 

42.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회장, 1840.01.31, 당고개)
서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박종원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매우 궁핍하게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범(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입국한 뒤 회장직을 맡아 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해 있던 그는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여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피신한 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에 체포되었고,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高順伊)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종원은 포청에서 아내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하였고 또 아내와 함께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79. 박큰아기 마리아  (부인, 1839.09.03, 서소문 밖)
박큰아기 마리아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궁녀인 동생 박희순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다. 1839년 4월 15일 동생과 함께, 피신해 있던 전경협의 집에서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동생 박희순이 순교한 지 100여 일이 지난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4세였다. 

77. 박후재 요한  (상인, 1839.09.03, 서소문 밖)
‘명관’으로도 불리던 박후재는 경기도 용인 지방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성장하면서 물장사를 하는 노모를 도와 짚신과 미투리를 팔아 생활하였고, 36세 때 교우 처녀와 결혼하였다.
1839년 5월 아내를 피신시키고 혼자 체포된 박후재는 포청에서 치도곤 40대를 맞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였다.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 피가 낭자하게 흘렀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또 흉악한 죄수들에게는 천주교의 바른 도리를 강론하였다. 이어 형조로 이송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박후재는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93. 박희순 루치아  (동정궁녀, 1839.05.24, 서소문 밖)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박희순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 때문에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으나, 어린 순조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으나 궁녀의 신분으로는 신앙생활이 어려워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왔다.
그 뒤로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 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박희순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전경협(全敬俠)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박희순은 언니, 전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 낸 박희순은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3. 베르뇌 시므온 (제4대조선교구장주교, 1866.03.07, 새남터)
‘베르뇌’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장 시므온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며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에 사제가 되었고 동양의 선교 지역인 베트남으로 건너갔다가 2년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그 뒤 만주 요동 지역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였고,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깊은 신심과 신학을 겸비한 장 주교는 이 땅에서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당뇨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목에 힘쓰면서 여러 지역의 교우들을 열심히 돌보았다. 1866년 2월 23일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고도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유스토, 서 루도비코, 김 헨리코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20.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 1866.03.07, 새남터)
‘볼리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서 루도비코 신부의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에 백, 김, 민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해성사를 줄 만큼 한국말을 배운 뒤 공주 지방의 전교를 맡았지만, 임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의 교우 집에 숨어 있었지만 1866년 2월 27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잘 참아 내었고 여러 질문에도 한국말이 서투르다는 핑계를 대며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그 해 3월 7일에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22. 브르트니애르  유스토 (신부, 1866.03.07, 새남터)
1866년 병인 박해 때에 순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인 백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가 되었다. 수품 직후 동료인 김 헨리코, 민 루가, 서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丁義培) 회장의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체포된 다음 날인 1866년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3월 7일 새남터에서 28세의 나이로 장 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

[사]

70. 샤스탕 야고보  (신부, 1839.09.21, 새남터)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가 된 정(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6. 손선지 베드로 (회장, 1866.12.13, 전주 숲정이)
‘승운’이라고도 불렸던 손선지는 충청도 임천(林川)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샤스탕)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혔다.
신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나, 관장에게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강요당하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손선지는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다가,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4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40. 손소벽 막달레나  (부인, 1840.01.31, 당고개)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손소벽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가 순교하고 또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7세 때 최창흡(崔昌洽)과 혼인하였으며,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남편과 함께 대세를 받고 성체를 모시고부터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6월, 손소벽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사위 조신철(趙信喆)이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의 출처 때문에 포청에서 주리 세 차례, 태장 260대를 맞는 혹형을 당하였으며, 형조에서도 세 차례의 형문(刑問)을 당하였다.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3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9. 손자선 토마스 (농부, 1866.03.30, 공주)
손자선은 충청도 홍주(洪州) 거더리 마을의 3대째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안 주교가 체포된 뒤 압수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는 기별을 받았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 손자선이 혼자서 물건들을 찾으러 덕산(德山)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관장은 손자선을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굴하지 않자 그를 해미(海美)로 보냈다.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심한 고문을 받고도 신앙을 지킨 손자선은 결국 공주(公州) 감영으로 이송되어 1866년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아 2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32 최양업   증거자 최양업 신부 ‘가경자’로 선포 16·05·13 1489
31 2차 시복대상 81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 심사, 본격 가동 15·08·27 1531
30 124위 복자   124위 한국 순교 복자 호칭 기도 15·05·10 1810
29 124위 복자   124위 복자 124위 초상 14·12·15 2080
28 2차 시복대상 81위   2차 시복대상자 :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13·07·04 2860
27 2차 시복대상 133위   2차 시복대상자 :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07·04 3095
26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명단 13·01·12 4803
25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가] 13·01·12 3214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나∼사] 13·01·12 3473
23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아] 13·01·12 3262
22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자∼하] 13·01·12 3044
21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기도문 13·01·12 3208
20 124위 복자   하느님의 종 125위 명단 13·01·12 4343
19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가] 13·01·12 5348
18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마∼사] 13·01·12 3438
17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아] 13·01·12 7345
16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자∼하] 13·01·12 4167
15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서한 일람표 12·12·16 3739
14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3번째 (마닐라/주산/상해에서) 12·12·16 3920
13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4-7번째 (요동 백가점에서) 12·12·16 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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