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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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103위 성인 | 124위 복자 | 김대건 | 최양업 | 2차 시복대상 133위 | 2차 시복대상 81위 |
124위 복자 :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가]
 paxkorea    | 2013·01·12 21:48 | HIT : 3,525 | VOTE : 606
[가]

33. 강경복 수산나 (1762∼1801. 7. 2,  ?-한양 서소문 밖, 참수)
강경복(姜景福) 수산나는 1762년 양민 집안에서 태어나 궁녀가 되었으며, 그녀가 살던 집은 ‘양제궁’이었는데, 1798년 무렵 집주인 송 마리아는 수산나에게 천주교를 믿도록 권유하고 수산나는 다른 궁녀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주 신부로부터 영세를 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01년 2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킨 후 자기도 피신하였지만 얼마 안되어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수산나는 즉시 문초와 형벌을 받아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것을 크게 뉘우치면서 다시 신앙을 굳게 증거 하였다. 수산나는 마침내 강완숙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32. 강완숙 골롬바 (1761∼1801. 7. 2, 충청도 내포-한양 서소문 밖, 참수)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1760년 충청도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덕산 지방의 홍지영 후처로 들어간 그녀는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고 이 후 열정과 극기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그녀의 인품을 알아차리고 여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4월 6일(음력 2월 24일) 체포되어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77. 고성대 베드로 (?∼1816. 12. 19, 충청도 덕산-경상도 대구, 참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이후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성대 베드로는 즉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1815년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78. 고성운 요셉 (?∼1816. 12. 19, 충청도 덕산-경상도 대구, 참수)
고성운(高聖云) 요셉은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래 성격이 착하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고, 형제끼리 언제나 합심하여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형과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현 경북 창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었다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다른 교우들을 모두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하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75. 구성열 바르바라 (?∼1816. 12. 19,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참수)
충청도 홍주의 한내장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출신인 구성열(具性悅) 바르바라는 본래 성격이 온화하고 덕행이 남달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첫 남편을 잃고 서석봉(안드레아)에게 개가하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서 과부’라고 불렀다. 그 후 바르바라 부부는 사위인 최봉한(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 배교할 마음이 있어 보이자 그녀의 사위인 프란치스코의 권면 덕택에 바르바라는 다시 신앙을 다잡았다. 17개월이 넘게 옥중 생활을 하였고, 그 동안 남편과 사위는 형벌로 인해 옥사하고 말았다.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약 40세였다.

109. 구한선 타데오 (1844∼1866, 경상도 함안-경상도 함안, 장사)
구한선(具漢善)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그는 글을 많이 읽었는데,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 즉시 이를 받아들여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거제도 전교에 동행한 적도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 옥에 갇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였다. 타대오의 글을 읽은 그 부인은 관장에게 그를 석방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이 말을 들은 관장은 화가 나서 그를 옥에서 끌어내도록 하여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다. 이처럼 모진 형벌을 당한 뒤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그 형벌로 인해 7일 만에 선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순교한 뒤 그의 이마에는 ‘품’(品)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고향 인근에 안장하였다.

82. 권천례 데레사 (1784∼1819. 8. 3, 경기도 양근-한양, 참수)
권천례(權千禮)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4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동정을 포기하고 21세 때 조숙(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65.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1769∼1802. 1. 30, 경기도 양근-경기도 양근, 참수)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는 양근 출신으로 권철신(암브로시오)이 큰아버지이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3. 권상연 야고보 (1751∼1791. 12. 8,  전라도 진산-전라도 전주, 참수)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 사촌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고모(즉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체포령이 내려져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각각 피신하였으나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진산 군수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야고보와 윤지충을 옥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정해진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때 초죽음이 된 상태였으면서도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장에 이르자, 윤지충이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어 야고보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73. 김강이 시몬 (?∼1815. 12. 5, 충청도 서산-강원도 원주, 옥사)
김강이(金鋼伊, 시몬)는 충청도 서산의 중인 출신으로 장성한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한데다가 재산도 많았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창귀(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1년 동안을 피신해 다녀야만 하였다.
1815년 경상도에서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강이 시몬은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안드레아)과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 이때 시몬은 용감하게 관장 앞으로 나아가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물을 돌려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시몬은 다시 찾은 재물들을 굶주리고 있는 옥중 교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으나 상처가 심하고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이상이었다.

59. 김계완 시몬 (?∼1802. 1. 29,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김계완(金啓完) 시몬은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였다. 1791년 최필공(토마스)으로부터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본 뒤 얼마 후 최창현(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해에 일어난 신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었다.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회복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힘썼고, 동료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12월경 토마스가 체포되자, 시몬은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는 동안 시몬의 늙은 아버지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또 시몬도 가족들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로 다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문초가 계속될수록 시몬의 신심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이후 그는 형조로 압송되었고,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44. 김광옥 안드레아 (?∼1801. 8. 25, 충청도 예산-충청도 예산, 참수)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출신의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은 그의 아들이다.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았으나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그는 예산으로,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얼마 후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신공을 바쳤다.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 참수 치명하였다. 당시 60세 가량이었다.

111.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1816∼1867. 1, 제주도 함덕-경상도 통영, 교수)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는 1816년 제주 함덕리(현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탄생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김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차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휴양중인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바울리노는 김기량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고 그의 신앙심은 얼마 안되어 아주 깊어지게 되었다. 그해 5월 31일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으며, 이후로도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로 제주의 복음화 노력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통영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들을 때려 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다시 혹독한 매질을 했으나 그래도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94. 김대권 베드로 (?∼1839. 5. 29, 충청도 청양-전라도 전주, 참수)
김대권(金大權) 베드로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살았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야고보)은 그의 아우이다. 한때 베드로는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아내를 구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그는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며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열심히 수계하며 살아가던중 아우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순교 원의를 나타냈다. 그 후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포졸들에게 웃는 얼굴로 잡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 기해박해 때, 전주 장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89. 김사건 안드레아 (1794∼1839. 5. 26, 충청도 서산-경상도 대구, 참수)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15년에 유배형을 받은 김창귀(타대오)는 그의 아버지였고, 그 해 강원도 원주에서 옥사한 김강이(시몬)는 그의 큰아버지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는 다리뼈가 허옇게 드러났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를 참아냈다. 대구로 압송되어 12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김사건 안드레아와 박사의(안드레아), 이재행(안드레아) 등이었다. 그들은 임금이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쓰던 물건과 옷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56. 김사집 프란치스코 (1744∼1802. 1. 25, 충청도 덕산-충청도 청주, 장사)
김(金)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책들은 하나 둘씩 포졸들에게 압수되었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고 다음 2개월 뒤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청주로 이송된 지 얼마 안되어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 사형 선고를 받고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85. 김세박 암브로시오 (1761∼1828. 12. 3, 한양-경상도 대구, 옥사)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1761년 한양의 역관 집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먼 친척이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나 성격이 포악한 아내는 그의 신앙생활을 오히려 심하게 방해하였다. 이에 그는 가족과 이별한 뒤,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교리를 가르쳐 주거나 교회 서적을 필사하면서 살아나갔다.
1827년의 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는 직접 안동 관아로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자백하였다. 한 달 후 대구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이재행(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는 형벌과 대재로 쇠약해진 탓에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828년 12월 3일(음력 10월 27일)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70. 김시우 알렉시오 (1782∼1815. 5.(음) (혹은 6월), 충청도 청양-경상도 대구, 옥사)
김시우(金時佑) 알렉시오는 1782년 충청도 청양의 양반 출신이며 성품이 착하고 어느 정도 학식도 있었다. 그러나 반신불수인 탓에 결혼도 못하고 가난하게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는 교우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주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였으므로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애긍이나, 왼손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약간의 돈을 얻기도 하였다.
그 후 진보 머루산 교우촌(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으로 이주하였다. 1815년 초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 포졸들이 교우들을 체포하자 자원하여 천주교 신자임을 밝혔다. 안동으로 끌려갔다가 대구로 압송되었다. 옥에서 그는 다른 죄수들처럼 음식과 바꿀 짚신을 삼을 수 없어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구할 수도 없었다. 대구로 이송되어 온 지 약 2개월 만에 굶주림과 형벌로 인한 상처 때문에 옥사하였다. 1815년 5월 혹은 6월경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36. 김연이 율리안나 (?∼1801. 7. 2, ?-한양 서소문 밖, 참수)
김연이(金連伊) 율리안나는 양민 출신의 부인으로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천주교의 매파(媒婆 : 중매인 노파)라고 불릴 정도로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녀는 ‘폐궁’(궁궐에서 쫓겨난 왕실의 친족이 거처하던 집이라는 뜻)인 양제궁을 자주 드나들며 왕실의 친족인 송 마리아와 그녀의 며느리 신 마리아, 궁녀 강경복(수산나) 등을 안내하여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시켰다.
1800년 12월 박해가 시작되자 김계완(시몬)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고, 다음해 박해령이 내려진 뒤에는 황사영(알렉시오)이 그녀의 집으로 피신해 왔다.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된 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고 강완숙 ․ 강경복 ․ 한신애 등 동료 8명과 함께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07. 김원중 스테파노 (?∼1866. 12. 16, 충청도 진천-충청도 공주, 교수)
충청도 진천의 발래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살던 김원중 스테파노는 본래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온후하였으며, 열심과 신덕이 교우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그의 이웃에는 사촌 김선화 베드로가 살고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관아에서는 발래기 신자들에게 천주교를 봉행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천주교 서적을 관아에 갖다 바치라고 하여 발래기 신자들은 대부분 분부대로 하고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으나 김원중만은 거절하였다.
나중에 출두하여 책을 갖다 바친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 책이라고 하자 즉시 그를 가두어 버렸다. 진천 관아에서 감사가 주재하던 공주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어떠한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끝까지 신앙을 증거 하였으며,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후 스테파노의 아우가 공주로 와서 이들 네 명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내 주었다.

69.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1815. 4. 말(음) (혹은 5월 초), 경상도 상주-경상도 대구, 장사)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金允德) 아가타 막달레나는, 장성한 뒤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였다. 그리고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대구로 이송되었다. 혹독한 형벌로 신앙을 배반하여 석방되었으나 막 감영의 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안드레아)을 만나 그의 권면으로 신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갔다. 배교를 취소하자 심한 매질로 뼈가 허옇게 드러나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가 1815년 4월 말 혹은 5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 가량이었다.

42. 김이우 바르나바 (?∼1801. 5.(음), 한양 명례방-한양 포도청, 장사)
김이우(金履禹) 바르나바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김현우(마태오)는 그의 아우이다. 김범우로부터 교리를 배워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그는 아우 마태오와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주 신부에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고 주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우 마태오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엄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결국 형벌을 끝까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경이었다.

45. 김정득 베드로 (?∼1801. 8. 25, 충청도 대흥-충청도 대흥, 참수)
김정득(金丁得)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 태생으로 친척인 김광옥(안드레아)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김광옥과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그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그는 김광옥과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 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96.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789∼1839. 10월 경, 충청도 덕산-전라도 전주, 옥사)
김조이(金召史)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바오로)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원만한 성격 때문에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마을 부인들의 교육에까지 유의하였으니, 그녀의 권면은 그들에게 아주 유익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였가 함께 있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그녀는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다시 형벌을 받은 뒤 옥에 갇혔고, 그녀의 어린 딸도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옥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옥중 생활을 하다가 자신이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는 못하였으니,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1839년 10월경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1세였다.

49. 김종교 프란치스코 (1754∼1801. 10. 4,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김종교(金宗敎) 프란치스코는 1754년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의원이 되었다. 그는 가난한데다가 호감이 가지 않는 외양을 하고는 있었지만, 학문에 대한 취미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인 이벽(요한)은 이러한 그를 매우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놀라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김범우(토마스)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처음부터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다음해 초 세례를 받았다. 체포된 후 두 번이나 신앙을 버리겠다고 했으나 형조로 이송된 후에는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 하였다. 그는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홍필주(필립보)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119. 김종륜 루가 (1819∼1868. 9. 14, 충청도 공주-경상도 울산, 참수)
김종륜(金宗倫) 루가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충청도 공주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경주요, 족보 이름은 ‘경희’(敬熙)이다. 루가는 평소에 특히 화목함을 강조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부모를 모시고 경상도 상주 멍에목(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으로 피신하였다. 다시 언양 간월(현 경북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을 거쳐 울산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죽령 교우촌에서 그는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허인백(야고보)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8년에는 그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김종륜 루가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어 루가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회장과 허인백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79. 김종한 안드레아 (?∼1816. 12. 19, 충청도 면천-경상도 대구, 참수)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났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한현’(漢鉉)으로 나온다.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비오)의 아들로, 성 김 데레사의 아버지가 되며, 성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가 된다. 맏형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부친 김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하고 그는 가족과 함께 홍주를 거쳐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1815년의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가 대구 감영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이 일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어 나갈 때 그녀를 열성적으로 권면하였고, 이에 감화되어 그녀는 다시 관장 앞으로 나아가 신앙을 증거하게 되었다.
그가 옥에 갇혀 있은 지 1년 6개월 정도가 지난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68. 김진후 비오 (1739∼1814. 12. 1, 충청도 면천-충청도 해미, 옥사)
충청도의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난 김진후(金震厚) 비오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으로 부터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가량 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천주교 교리에 무관심했으나 자식들의 노력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1791년과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0년간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냈으나, 결국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47. 김천애 안드레아 (1760∼1801. 8. 27 (혹은 8. 28), ?-전라도 전주, 참수)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당시 유항검의 집은 전주의 초남이에 있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전라도에서는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고 그 뒤를 이어 김천애와 유항검의 맏아들인 유중철(요한)이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 해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혹은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34. 김현우 마태오 (1775∼1801. 7. 2, 한양 명례방-한양 서소문 밖, 참수)
김현우(金顯禹) 마태오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 김이우(바르나바)는 그의 친형이다. 김범우로부터 교리를 배워 형제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형과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형 바르나바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특히 그가 체포될 때는 찬란하고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나 그의 앞에서 옥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고 전한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80. 김화춘 야고보 (?∼1816. 12. 19, 충청도 청양-경상도 대구, 참수)
김화춘 야고보[金若古排]는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나 보령의 청라동으로 이주해 살았다.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베드로)은 그의 형이다.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있던 그는 기도 생활과 성서 읽기에 부지런하여 교우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경상도 청송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 청송 일대의 신자들을 수색할 때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고, 고성대(베드로) 형제, 구성열(바르바라) 등과 함께 대구로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야고보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이었다.

74. 김희성 프란치스코 (1765∼1816. 12. 19, 충청도 예산-경상도 대구,  참수)
교우들 사이에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 출신으로,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은 바로 그의 부친이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하자,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 때 곧은장에서 체포되어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를 김종한(안드레아)과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32 최양업   증거자 최양업 신부 ‘가경자’로 선포 16·05·13 1268
31 2차 시복대상 81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 심사, 본격 가동 15·08·27 1352
30 124위 복자   124위 한국 순교 복자 호칭 기도 15·05·10 1595
29 124위 복자   124위 복자 124위 초상 14·12·15 1852
28 2차 시복대상 81위   2차 시복대상자 :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13·07·04 2676
27 2차 시복대상 133위   2차 시복대상자 :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07·04 2934
26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명단 13·01·12 4369
25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가] 13·01·12 3015
24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나∼사] 13·01·12 3250
23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아] 13·01·12 3051
22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자∼하] 13·01·12 2825
21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기도문 13·01·12 2896
20 124위 복자   하느님의 종 125위 명단 13·01·12 4078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가] 13·01·12 3525
18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마∼사] 13·01·12 3228
17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아] 13·01·12 6629
16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자∼하] 13·01·12 3907
15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서한 일람표 12·12·16 3542
14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3번째 (마닐라/주산/상해에서) 12·12·16 3689
13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4-7번째 (요동 백가점에서) 12·12·16 3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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