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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103위 성인 | 124위 복자 | 김대건 | 최양업 | 2차 시복대상 133위 | 2차 시복대상 81위 |
124위 복자 :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마∼사]
 paxkorea    | 2013·01·12 21:46 | HIT : 3,015 | VOTE : 525
[마]

35. 문영인 비비안나 (1776∼1801. 7. 2,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는 한양에 거주하던 중인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여덟 살이 되던 1783년에 궁녀로 뽑혀 궁궐에서 문서 쓰는 일을 맡았다. 22살 때 병에 걸려 잠시 궁궐에서 나왔을 때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병이 완쾌되어 다시 궁궐로 들어갔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녀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모범을 본받으려고 하였으며, 자주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그러다가 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8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는 26세의 동정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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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박경화 바오로 (1757∼1827. 11. 15,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옥사)
박경화 바오로[朴甫祿]는,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33살 무렵 입교하였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는 그의 아들이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고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하기까지 하였다.
60세가 지나서 바오로는 가족들과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하여 살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교우들과 함께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형벌을 받아 노령으로 감내하지 못하고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5개월 후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발굴하였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123. 박대식 빅토리노 (1812∼1868. 10. 12, 경상도 김해-경상도 대구, 참수)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는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군 진례면 시예리) 사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로는 언제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의 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함께 그의 집으로 몰려와 빅토리노와 그의 조카 박수연을 체포하여 김해 관아로 압송하였다. 당시 그의 조카는 아직 예비 신자였다.
김해 관아의 옥에서 빅토리노는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동료로 맞이하였다. 이후 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한 뒤 3일 만에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이에 따라 빅토리노는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로, 당시 빅토리노의 나이는 57세였다. 가족들은 그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구로 와서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88. 박사의 안드레아 (1792∼1839. 5. 26,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참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1827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경화(바오로)의 아들로,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에 입교해 있었다. 가족들과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로 이주하여 살다가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고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다. 교우들과 함께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형벌을 받아 신앙의 힘으로 참아냈다. 반면에 노령인 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자 관장은 효성에 감동하여 그들 부자를 함께 신문하였고, 옥에서도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112. 박상근 마티아 (1837∼1867. 1, 경상도 문경-경상도 상주, 교수)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칼래(N. Calais, 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마티아는 좁쌀을 사기 위해 칼래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로 갔다가 칼래 신부와 함께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와서 신부를 숨겨 주었다.
3일 후 마티아는 칼래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만 하였다. 이때 칼래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른 뒤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울면서 따라가서 도와드리기로 애걸했으나 결국 칼래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마 후 숙모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어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여기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10. 박취득 라우렌시오 (?∼1799. 4. 3, 충청도 면천-충청도 홍주, 교수)
충청도 홍주의 면천에서 태어난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라우렌시오는 고향의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자주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관장 앞으로 가서 교우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797년의 정사박해 때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면천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는 모두 1천 4백 대 이상이나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옥졸들은 이제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뒤에 밖에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옥졸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이튿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들이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으니, 이때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0세였다.

121. 박경진 프란치스코 (1835∼1868. 9. 28 (혹은 9월 29일), 충청도-경기도 죽산)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절골에서 약 2년 동안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쳐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그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그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후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비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아내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들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4세였다.

9. 방 프란치스코 (?∼1799. 1. 21, 충청도 면천-충청도 홍주, 장사 혹은 교수)
방(方)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도 다음해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슬퍼하는 교우 두 동료들도 권면하여 거룩한 기쁨을 같이 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1799년 1월 21일(음력 1798년 12월 16일) 순교하였다.
13. 배관겸 프란치스코  (?∼1800. 1. 7, 충청도 당진-충청도 청주, 장사)
충청도 당진의 진목(현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인 배(裵)관겸 프란치스코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 입교하였다. 그의 고향 진목은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내포 지역 안에 있었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되어 즉시 자신의 죄를 진실히 뉘우쳤다.
이후 서산으로 이주하였다가 고향 이웃에 있던 면천의 양제(현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로 돌아와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1794년 10월 3일 밀고자에 의해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하였다. 형리들의 매질이 계속되면서 끝내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1800년 1월 7일(음력 1799년 12월 13일)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약 60세였다.

[사]

72. 서석봉 안드레아 (?∼1815. 말, ?-경상도 대구, 옥사)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구성열(바르바라)의 남편이며, 1815년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 최봉한(프란치스코)의 장인이다. 훗날 신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 박씨(朴氏)의 외조부’라고 전해져 왔다. 과부 바르바라와 혼인한 그는 그 후 사위 프란치스코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창송군 안덕면 노래2동)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아내와 사위 등과 함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그는 동료들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벌로 인해 쇠약해진 탓에 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순교하고 말았다.

57. 손경윤 제르바시오 (1760∼1802. 1. 29,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는 1760년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였다. 1790년 최필공(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한 그는 두 번이나 체포되어 형조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여전히 석방되자마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 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밀고 되어 그는 아우와 함께 피신해 다니다 자기 대신 처자가 포도청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수하였다.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졌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굳은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였다.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113. 송 베네딕도 (1798∼1867, 충청도 충주-한양)
송(宋) 베네딕도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이후 그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아들 가족과 함께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쳤다. 송 베네딕도를 비롯하여 아들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가장 나이가 많은 베네딕도와 그의 아들 베드로,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네딕도의 나이는 70세였다.

114. 송 베드로 (1821∼1867, 충청도 충주-한양)
송(宋) 베드로는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 베네딕도를 모시면서 성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그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부친 베네딕도와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 송 베드로의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베드로와 그의 부친 베네딕도, 베드로의 처녀 딸, 베드로의 며느리 이 안나,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47세였다.

106. 신석복 마르코 (1828∼1866. 3. 31 (혹은 3월 18일), 경상도 밀양-경상도 대구, 교수)
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해온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 쫓아 갔다. 그들 일행을 만난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과 수작한 뒤,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대구로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대구에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게 되었다. 그런 다음 며칠을 옥에 가두었다가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91. 신태보 베드로 (?∼1839. 5. 29, 경기도-전라도 전주, 참수)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베드로는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다.

31. 심아기 바르바라 (1783∼1801. 4. 초(음), 경기도 광주-한양 포도청, 장사)
경기도 광주 태생인 심아기(沈阿只) 바르바라는 오빠 심낙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빠가 체포되고 그녀도 곧 체포되었다.
이후 그녀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형벌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였다. 반면에 바르바라에 앞서 체포된 오빠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무안(務安)으로 유배되었다.

97. 심조이 바르바라 (1813∼1839. 11. 11, 경기도 인천-전라도 전주, 옥사)
심조이(沈召史)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토마스)와 결혼하였다. 1801년의 순교자 홍낙민(루가)은 그의 시조부였으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순교한 홍재영(프로타시오)은 그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심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서 살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녀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이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하였으나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두 살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마침내 전라 감사는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그녀는 형벌로 인한 고통에 이질까지 걸렸으며, 스스로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되자 타당하게 예비한 뒤 죽음을 맞이하였다. 순교한 날은 1839년 11월 11일(음력 10월 6일)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 그 뒤를 이어 그녀의 아들도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32 최양업   증거자 최양업 신부 ‘가경자’로 선포 16·05·13 1078
31 2차 시복대상 81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 심사, 본격 가동 15·08·27 1169
30 124위 복자   124위 한국 순교 복자 호칭 기도 15·05·10 1390
29 124위 복자   124위 복자 124위 초상 14·12·15 1619
28 2차 시복대상 81위   2차 시복대상자 :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13·07·04 2505
27 2차 시복대상 133위   2차 시복대상자 :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07·04 2768
26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명단 13·01·12 4014
25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가] 13·01·12 2821
24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나∼사] 13·01·12 3060
23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아] 13·01·12 2848
22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자∼하] 13·01·12 2644
21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기도문 13·01·12 2721
20 124위 복자   하느님의 종 125위 명단 13·01·12 3817
19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가] 13·01·12 3295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마∼사] 13·01·12 3015
17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아] 13·01·12 5886
16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자∼하] 13·01·12 3683
15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서한 일람표 12·12·16 3335
14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3번째 (마닐라/주산/상해에서) 12·12·16 3487
13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4-7번째 (요동 백가점에서) 12·12·16 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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