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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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103위 성인 | 124위 복자 | 김대건 | 최양업 | 2차 시복대상 133위 | 2차 시복대상 81위 |
124위 복자 :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아]
 paxkorea    | 2013·01·12 21:39 | HIT : 7,740 | VOTE : 565
[아]

86. 안군심 리카르도 (1774∼1835, 충청도 보령-경상도 대구, 옥사)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난 안군심 리카르도는 청년 시절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하였으며,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교회 서적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면서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리카르도는, 언젠가 자신도 체포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동안 교우들에게 나누어준 서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얼마 동안 숨어 지내면서 순교할 준비를 하였는데,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8년 동안 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5년 이질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117. 양재현 마르티노 (1827∼1868. 여름, 경상도-경상도 동래, 참수)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 체포되어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수군의 병영에서도 여전히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고 옥에 수감되었다. 옥에서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졸은 그가 집으로 돌아가자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다시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장대(將臺)에서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122. 오 마르가리타 (?∼1868. 9. 28 (혹은 9월 29일), ?-경기도 죽산)
오(吳) 마르가리타의 출생지와 천주교에 입교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고, 훗날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이후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쳐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먼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한편 가족들의 사정이 궁금해진 남편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한 비신자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들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9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다.

105. 오반지 바오로 (1813∼1866. 3. 27 (혹은 3월 26일), 충청도 진천-충청도 청주, 교수)
오반지(吳盤池)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이내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후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관장의 유혹에 오반지는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으나 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함께 갇혀있던 함께 체포된 젊은이, 그리고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는 배교하였다.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가 사형 집행 전 그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66년 2월 11일(양력 3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 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103. 오종례 야고보 (1821∼1840. 1. 4, 충청도 은진-전라도 전주, 참수)
오종례(吳宗禮) 야고보는 충청도 은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장성한 뒤로는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결혼 직후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는데, 진산에 살고 있던 형을 찾아갔다가 형과 다른 교우 여럿과 함께 18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는 관장의 배교 유혹에도 꿋꿋하게 이를 참아낸 다음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는 그가 오래 전부터 원하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형이 배교하는 것을 보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다른 증거자들과 고통을 나누었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24. 원경도 요한 (1774∼1801. 4. 25,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원경도(元景道) 요한은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24살 되던 1797년에 사촌 이중배(마르티노)와 함께 김건순(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800년의 부활 대축일에 신자들과 체포되어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옥중에는 후에 체포된 요한의 장인 최창주도 함께 있었다. 1800년 10월에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고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11. 원시보 야고보 (1730∼1799. 4. 17, 충청도 홍주-충청도 청주, 장사)
원(元)시보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 출신이다.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베드로)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보’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이때 그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피신하였으나, 원시장은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순교하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만났으나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즉시 첩을 내보냈다.
2년 후 1798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형벌로 인해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청주로 이송되어 온갖 혹형으로 1799년 4월 17일(음력 3월 13일) 순교하니,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약 50가족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4. 원시장 베드로 (1732∼1793. 1. 28, 충청도 홍주-충청도 홍주, 장사)
원(元)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60세가 가까워졌을 때 사촌 형 원시보(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사촌 원시보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그는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 매질을 해도 소용이 없자 관장은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하였다.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54. 유문석 요한 (1784∼1801. 11. 14, 전라도 전주-전라도 전주, 교수)
유문석(柳文碩) 요한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요한의 나이는 12살이었다. 1801년 박해 때 초남이에서는 그의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중순 그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나와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었다.

67. 유중성 마태오 (?∼1802. 1. 31, 전라도 전주-전라도 전주, 참수)
유중성(柳重誠)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후 그는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집안에서는 유항검과 유중철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 유배지로 가며 사람들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쳤다. 그러자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였다.

53. 유중철 요한 (1779∼1801. 11. 14, 전라도 전주-전라도 전주, 교수)
유중철(柳重哲)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으로부터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7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 영성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로부터 동정을 지키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신부는 전주에 사는 요한을 생각하고는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그 결과 1797년 10월 요한과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해 9월 요한은 아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9월 중순에는 요한의 아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 포졸들은 유문석을 가족들에게서 떼어내 형인 유중철 요한에게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당시 요한의 나이는 23세였다.

51.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 10. 24, 전라도 전주-전라도 전주, 능지처참)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의 인척 권일신이었다.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1786년 봄에 가성직제도하에서 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에서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24. 윤봉문 요셉 (1852∼1888. 4. 1, 경상도 경주-경상도 진주, 교수)
윤봉문(尹鳳文) 요셉은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스타니슬라오)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현 통영시 이운면)에 정착하였다. 그의 부친은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다녔다. 또 거제도로 이주한 뒤에는 진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입교시켰으며, 이러한 인연 때문에 윤봉문 요셉은 장성한 뒤 진 아녜스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1887년 겨울에는 경상도 담임 신부인 로베르 신부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도를 방문하였다. 이때 요셉은 로베르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였는데, 그 해 거제도에서는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듬해 봄에 박해가 일어나 통영 포졸들에게 요셉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통영 관장은 이 사실을 곧바로 대구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감사는 요셉을 진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윤봉문은 진주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 날 밤으로 옥리들을 시켜 교수형을 집행토록 하였으니, 그때가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로, 당시 요셉의 나이는 37세였다.

27. 윤운혜 루치아 (?∼1801. 5. 14, 경기도-한양 서소문 밖, 참수)
윤운혜(尹雲惠)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아가타)는 그의 언니가 된다. 그는 여주에 사는 정광수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받을 수 없었다. 결국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 마당 한편에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필립보),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롬바), 정복혜(칸디다) 등이었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자, 그녀는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킨 다음,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운혜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25. 윤유오 야고보 (?∼1801. 4. 27, 경기도 여주-경기도 양근, 참수)
윤유오(尹有五) 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후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유스티노),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윤유오도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결국 관장은 야고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 나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5.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6. 28, 경기도 여주-한양 포도청, 장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그는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신자가 바로 바오로였다. 이에 따라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구베아 주교를 만나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그가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이후에도 바오로는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최인길, 윤유일, 지황은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6세였다.

40. 윤점혜 아가타 (?∼1801. 7. 4, 경기도-경기도 양근, 참수)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 혹은 마르타)는 그의 동생이다. 아가타는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 용납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남장을 하고 사촌오빠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1795년 윤유일이 순교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그때부터는 결혼한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나갔다. 1797년에는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녀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다시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유 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1. 윤지충 바오로 (1759∼1791. 12. 8, 전라도 진산-전라도 전주, 참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은 그의 아우이다. 본래 총명한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고종 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1787년 인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이종 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즉 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듣고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조정에 보고하여 처형의 윤허를 받았다.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바오로와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52.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1801. 10. 24, 전라도 진산-전라도 전주, 능지처참)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군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1791년에 형이 순교하자 그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동료들과 함께 전주 감영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58. 이경도 가롤로 (1780∼1802. 1. 29,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이경도(李景陶) 가롤로는, 1780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의 누이였다.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누갈다)와 1827년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의 동생들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이경도 가롤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83. 이경언 바오로 (1792∼1827. 6. 27, 한양-전라도 전주, 옥사)
이경언(李景彦) 바오로는, 1792년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충청도 연기 군수를 지냈으며,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외조부였던 이익의 학문을 잇고 있었다. 또 그의 어머니는 교회 창설에 기여한 권일신의 누이였다. 1802년 한양에서 순교한 이경도(가롤로)는 그의 형이고,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누나였다.
그는 이후 명도회(明道會)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회장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성 정하상(바오로)이 북경을 왕래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것도 바로 그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난 뒤 체포된 포도청에서 전주로 이송되었다. 선천적으로 약했던 그는 1827년 6월 27일(음력 윤5월 4일) 전주 옥중에서 옥사하였다.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43. 이국승 바오로 (1772∼1801. 5. 말(음), 충청도 음성-충청도 공주, 참수)
이국승(李國昇) 바오로는 충청도 음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로 이주해 살았다. 천주교 신앙에 대해 철저히 배우기 위해 경기도 양근 땅으로 권일신을 방문하여 교리를 배웠다. 1795년의 을묘박해 때 형벌을 받던 도중에 석방되었다. 잘못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하였다. 동정을 지키며 살기로 작정하였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이를 피하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옥에 도달하였을 때, 황해도 출신의 고광성이 배교하고 옥문을 나서자 권면하였으며, 고광성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며칠 후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8. 이도기 바오로 (1743∼1798. 7. 24, 충청도 청양-충청도 정산, 장사)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李道起) 바오로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본래 그는 글을 알지 못하였지만,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 청양을 떠나 산 너머에 있는 정산으로 이주한 뒤, 그곳 옹기점에 터전을 잡았다.
1797년, 바오로의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발생하여 6월 8일 체포되어 정산 관아로 끌려간 그는 6월 10일 아침, 정산 형장으로 가서 갔고, 그곳에서 비신자들까지 가세한 혹독한 형벌을 받아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그때가 1798년 7월 24일(음력 6월 12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15. 이보현 프란치스코 (1773∼1800. 1. 9, 충청도 덕산-충청도 해미, 장사)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난폭하였으나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보현의 누이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연산에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어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다음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후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98.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1827∼1839. 12. 5 (혹은 12월 6일), ?-전라도 전주, 교수)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무렵, 이성삼(바오로)과 김조이(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모들은 정해박해로 인해 피신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게 된 그녀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알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귀여운 신심을 지닌 하나의 작은 천사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프로타시아)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나이가 어려 형벌을 받지 않은 채 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포졸과 옥리들은 그녀의 나이가 어린데다가 얌전하였으므로 동정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녀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하였다.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5일(음력 10월 30일)에서 6일 밤(음력 11월 1일)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다.

104. 이성례 마리아 (1801∼1840. 1. 31, 충청도 홍주-한양 당고개, 참수)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던 그녀는 18세 때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낳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수리산 교우촌에서 포도청으로 압송된 마리아는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스테파노가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66. 이순이 누갈다 (1782∼1802. 1. 31, 한양-전라도 전주, 참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경도(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녀와 남매간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17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리고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첫 영성체를 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나흘 동안을 집안에 들어앉아 영성체를 받기 위한 교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루갈다는 오로지 성체를 보존하고 덕행을 쌓는 데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배필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16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루갈다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주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때 신부는 동정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전주 유중철이 머리에 떠올랐으며, 이에 즉시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다음해 9월 루갈다는 남편의 고향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남편 요한이 동정 서약을 어기려고 할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결과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녀가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간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76. 이시임 안나 (1782∼1816. 12. 19, 충청도 덕산-경상도 대구, 참수)
충청도 덕산의 높은 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나이가 들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고향을 떠나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8년 뒤 전주 옥에서 사망한 이성지(요한)는 그녀의 오빠였다.
안나는 재색을 겸비한 처녀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동정녀 공동체로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공동체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한 뱃사공은 강제로 그녀와 혼인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종악이가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몇 해 안되어 남편이 사망하였고, 어린 종악이를 데리고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교우촌으로 가서 살았다.
1815년에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에서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고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약 1년 6개월이 지난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115. 이 안나 (1841∼1867, 경기도 인천-한양)
이(李) 안나는 인천 재궁골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자 충청도 충주 서촌에 살던 교우 송(宋) 베드로의 아들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시조부 송 베네딕도와 시부모를 모시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후 송씨 집안이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진천 배티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하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 배티로 몰려온 포졸들은 그곳에 거주하던 이 안나와 그녀의 시댁 식구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런 다음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다가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이들은 안나의 시조부인 베네딕도를 비롯하여 그녀의 시아버지 송 베드로, 베드로의 딸,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다. 이들 가족은 한양으로 압송된 후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으로, 당시 안나의 나이는 27세였다.

118. 이양등 베드로 (?∼1868. 9. 14, 경상도-경상도 울산, 참수)
이양등(李陽登) 베드로는 경상도 울산의 죽령 교우촌(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회장이었다. 본래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는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는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온 허인백(야고보)과 김종륜(루가)을 만나 서로 권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2년 뒤인 1868년 포졸들이 마침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게 되었고, 베드로는 그곳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가는 동안 이양등 베드로는 동료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여 순교를 결심하였다. 실제로 그는 경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어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허인백 ․ 김종륜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90. 이일언 욥 (1767∼1839. 5. 29, 충청도 홍주-전라도 전주, 참수)
충청도 홍주의 대벌 마을에서 태어난 이태문(李太文) 욥은 1801년 이전에 아버지 점손(占孫)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경상도 안의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이후 10년을 갇혀 있는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다.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일언의 아내는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이전에 순교하지 못한 것이 분하다며 사흘 후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김대권(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87. 이재행 안드레아 (1776∼1839. 5. 26,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참수)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서야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본래 성격이 꼿꼿하고 관대하여 존경을 받았던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성실하게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산골로 은거해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교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면서 격려하였다. 경상도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살고 있을 때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 신앙을 증거하였다. 대구로 이송되었다. 당시까지 대구 옥에 갇혀 있던 신자는 이재행(안드레아)과 김사건(안드레아), 박사의(안드레아) 등이었다.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안드레아는 동료들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이를 바라보는 죄수와 옥졸들이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그들이 보여준 모범 때문이었다. 순교 당시 이재행 안드레아의 나이는 64세였다.

116. 이정식 요한 (1794∼1868. 여름, 경상도 동래-경상도 동래, 참수)
이정식(李廷植)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60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그는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과 조카 이삼근(베드로)은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장대로 압송되었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하자,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102. 이조이 막달레나 (1808∼1840. 1. 4, ?-전라도 전주, 참수)
이조이(李召史) 막달레나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장성한 뒤 그녀는 금산 고을에 살던 김성서(프란치스코)의 아우와 혼인을 하였으나 20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죽기에 앞서 그녀에게 수계를 열심히 하도록 당부하였다. 그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발적으로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하였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힘썼고, 무엇보다도 무식한 이들을 가르치는 귀찮은 일을 기꺼이 맡았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조이 막달레나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문초를 받는 동안 과감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갖가지 형벌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괴로움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함께 있는 신자들이 끝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2세였다.

23. 이중배 마르티노 (?∼1801. 4. 25,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본래 난폭하고 성을 잘 내는 성격도 있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완전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사촌인 원경도(요한)와 함께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김건순(요사팟)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1800년의 부활 대축일에 신자들이 모임에서 체포되어 6개월이나 옥중 생활을 하였다. 그는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었는데 옥중에서 보여준 그의 의술은 기적과 같은 효험을 나타냈다고 한다. 1800년 10월에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하라는 판결에 따라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50세 가량이었다.

92. 이태권 베드로 (1782∼1839. 5. 29, 충청도 홍주-전라도 전주, 참수)
이태권(李太權)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배울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를 갔다가 3년 후 그곳에서 사망한 이무명은 그의 아버지이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바오로)은 그의 삼촌이다.
그는 열 살 때인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석방된 적이 있으며,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또다시 석방되었다. 또 1802년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심약한 마음을 나타냈지만, 석방된 후에는 천주교의 본분을 계속해서 지켜나갔다. 1827년에 다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김대권(베드로), 이태문(욥)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 있다 1839년의 기해박해 5월 29일(음력 4월 17일)에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37. 이 현 안토니오 (?∼1801. 7. 2, 경기도 여주-한양 서소문 밖, 참수)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이현(李鉉) 안토니오는 삼촌 이희영(루가)이 김건순(요사팟)의 집에서 살게 되자 자주 그곳을 왕래하였으며, 1797년 가을부터 김건순에게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한양으로 올라가 홍필주(필립보)의 집을 찾아가 교리를 더 공부한 뒤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정광수(바르나바), 최필제(베드로), 김종교(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 후 그는 홍익만(안토니오)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이로써 홍필주와는 동서 사이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계속된 형벌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버리고 마음을 고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후 형조로 이송된 안토니오는 포도청에서의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동료들과 함께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4. 인언민 마르티노 (1737∼1800. 1. 9, 충청도 덕산-충청도 해미, 장사)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황사영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장남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두었으며,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 때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해미 옥에서 그는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기 시작다가 그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32 최양업   증거자 최양업 신부 ‘가경자’로 선포 16·05·13 1632
31 2차 시복대상 81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 심사, 본격 가동 15·08·27 1631
30 124위 복자   124위 한국 순교 복자 호칭 기도 15·05·10 1937
29 124위 복자   124위 복자 124위 초상 14·12·15 2230
28 2차 시복대상 81위   2차 시복대상자 :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13·07·04 2974
27 2차 시복대상 133위   2차 시복대상자 :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07·04 3224
26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명단 13·01·12 5046
25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가] 13·01·12 3318
24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나∼사] 13·01·12 3621
23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아] 13·01·12 3387
22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자∼하] 13·01·12 3170
21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기도문 13·01·12 3386
20 124위 복자   하느님의 종 125위 명단 13·01·12 4549
19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가] 13·01·12 5526
18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마∼사] 13·01·12 3564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아] 13·01·12 7740
16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자∼하] 13·01·12 4326
15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서한 일람표 12·12·16 3860
14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3번째 (마닐라/주산/상해에서) 12·12·16 4068
13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4-7번째 (요동 백가점에서) 12·12·16 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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