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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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103위 성인 | 124위 복자 | 김대건 | 최양업 | 2차 시복대상 133위 | 2차 시복대상 81위 |
124위 복자 :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자∼하]
 paxkorea    | 2013·01·12 21:31 | HIT : 4,325 | VOTE : 809
[자]

108. 장 토마스 (1815∼1866, 경기도 수원-충청도 청주, 참수)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張)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으나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곧 청주 포졸들에게 그와 가족들이 모두 체포되고 진천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그의 대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2세였다.

60. 정광수 바르나바 (?∼1802. 1. 29,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는 경기도 여주 부곡(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함으로써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부인이고, 정순매(바르바라)는 그의 여동생이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바르나바는 한양으로 올라가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도 배웠다. 그리고 신부의 명에 따라 김건순(요사팟)에게 편지를 전하였으며, 고향 인근에 교리를 전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부모의 반대로 그는 1799년 아내와 함께 여주를 떠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런 다음 자신의 집 한편에 교회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이곳을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의 여동생 정순매도 그들 부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처형 윤점혜(아가타)가 체포되고 2월에는 그의 집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아내 윤운혜가 체포되었다. 정광수는 피신해 다니다 단념하고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그때가 1801년 9월이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형벌을 받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여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28. 정복혜 칸디다 (?∼1801. 5. 14, 한양 인근-한양 서소문 밖, 참수)
신자들 사이에서는 ‘정 과부’라고 알려진 정복혜(鄭福惠) 칸디다는 한양 근처에 살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혼인한 뒤 한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무렵 이합규를 만나 교리를 배우면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과부가 된 후에는 한신애(아가타),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신자들 사이의 연락과 복음 전파에 노력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성물과 서적들을 한신애 집에 숨겨두고, 교우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2월 체포되어 그 동안의 행적을 추궁하였다. 이때 그녀는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곧 이를 뉘우치고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2. 정산필 베드로 (?∼1799, 충청도 덕산-충청도 덕산, 참수 혹은 장사)
충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산필(鄭山弼) 베드로는, 본래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비상하여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아주 겸손하고 온순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신부를 찾아가 직접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에는 내포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이 맡은 직분을 다하였다.
그에게는 박취득(라우렌시오), 원시보(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797년에 일어난 정사박해 때 각각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정산필이 체포된 것은 1798년이나 1799년이었다. 덕산 관아에서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하였다.  1799년 형장으로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내지 60세였다.

41. 정순매 바르바라 (1777∼1801. 7. 3 (혹은 7월 4일),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정순매(鄭順每) 바르바라는 열아홉 살 되던 1795년에 한양에 살던 오빠 부부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오빠는 주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한 정광수(바르나바)였고, 올케는 유명한 교우 집안 출신인 윤운혜(루치아)로, 모두 1801년에 순교하였다.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과부로 행세하였다. 그녀는 오빠 부부를 도와 교회 서적과 성물을 보급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윤점혜(아가타)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순매 바르바라는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아주 뛰어난 용덕을 보여 주었다.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명령에 따라 여주로 이송되어 1801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이나 4일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25세로 동정녀였다.

18.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 4. 8, 경기도 광주-한양 서소문 밖, 참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는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과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약종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후인 1786년에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한편 주 신부는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한 뒤 그를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음력 2월 11일에 체포되어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으나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에게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체포된 지 15일 만에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29. 정인혁 타대오 (?∼1801. 5. 14,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하던 정인혁(鄭仁赫) 타대오는 1790년 무렵 최필제(베드로)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형제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제사도 폐지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어 그의 형제들은 엄한 형벌에 굴복하였으나, 그는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의 가족들이 그를 회유할 수 있도록 3일 동안의 기한을 두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맏형은 형조로 들어가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으므로 다시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도 받았다. 또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회원이 되어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각각 문초와 형벌을 받고 최필제 등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10. 정찬문 안토니오 (1822∼1867. 1. 25, 경상도 진주-경상도 진주, 장사)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는 먼저 영세 입교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니, 그때가 그의 나이 42세 때인 1863년이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에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그도 그 해 가을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진주로 끌려간 그는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그에게 넣어주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무수히 매를 맞고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날 밤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30. 정철상 가롤로 (?∼1801. 5. 14, 경기도 광주-한양 서소문 밖, 참수)
정철상(丁哲祥) 가롤로는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1839년에 순교한 유소사(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하상(바오로) 성인과 정정혜(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동생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포천의 유명한 신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가 20세 가량 되었을 무렵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그들을 따라가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4월 8일 부친이 순교하던 날, 그는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다.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대면서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관리들은 문초로 그의 생각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한 달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가 최필제(베드로), 윤운혜(루치아)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이었다.

93. 정태봉 바오로 (1796∼1839. 5. 29, 충청도 덕산-전라도 전주, 참수)
1796년 충청도 덕산에서 태어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5촌 당숙의 손에 의해 자라났다. 1799년경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베드로) 회장은 그의 사촌이다. 본래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였던 그는 고아가 겪어야만 하였던 시련들을 인내와 체념으로 견디어냈다. 또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용담에서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에 정해박해가 일어을 때 밀고자가 모든 사실을 관아에 일러바쳤고, 이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다. 당시 포졸들이 가지고 온 영장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모면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포졸들을 따라 용담 관아로 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이일언(욥), 김대권(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 동료들과 함께 전주 장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81. 조 숙 베드로 (1787∼1819. 8. 3, 경기도 양근-한양, 참수)
조숙(趙塾)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이다. 이후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8세 때 권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였다. 혼인날 밤, 아내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는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 바오로는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한양에 있는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온갖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정 바오로가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아내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다. 문초중에 데레사는 남편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그들은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베드로의 나이는 33살이었다.

16. 조용삼 베드로 (?∼1801. 3. 27, 경기도 양근-경기도 감영, 옥사)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후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후 베드로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경기도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2. 주문모 야고보 (17521∼801. 5. 31, 중국 소주-한양 새남터, 군문효수)
1752년 중국 강남성 소주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사람과 닮은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사바)과 박 요한을 만나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 조선에 입국하였다. 주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고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주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음력 3월 11일, 주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며, 군문효수형을 선고하였고, 새남터에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신부가 순교할 당시 청명한 하늘이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즉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7. 지 황 사바 (1767∼1795. 6. 28, 한양-한양 포도청, 장사)
지황(池璜) 사바는 1767년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1789년 이래 조선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었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것은 1793년이었다. 이때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유일(바오로)을 비롯하여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 다음 윤유일은 그곳에 남고, 사바와 요한이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로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해 실패하여 지황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문모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는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유일과 함께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밀고자에 의해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신부의 입국을 도운 사바와 윤유일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하였다. 그런 다음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사바의 나이는 29세였다.

[차]

99. 최 비르짓다 (1783∼1839. 12. 8 (혹은 12월 9일), 충청도-강원도 원주, 교수)
최(崔) 비르짓다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신유박해 때 남편이 교우 황사영을 숨겨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 남편은 유배된 후 그곳에서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1839년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요한)은 그녀의 조카이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의지할 데가 없었으므로 오빠에게로 돌아왔다. 그 오빠가 곧 최해성의 부친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최해성이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갇히자 그녀는 조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를 만나기 위해 감옥으로 갔다가 관원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녀를 죄인이라고 지목하면서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이를 참아 받았다. 굶겨 죽이라고 명령하였으나 그녀는 금방 죽지 않고 4개월 후에도 그녀가 죽지 않은 것을 본 관원은 다시 똑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3일 안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때 옥리들은 3일 안에는 그녀를 굶겨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날 밤에 옥으로 들어가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39년 12월 8일(음력 11월 3일)과 9일 밤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 비르짓다가 순교한 뒤, 옥리의 어머니는 옥에 갇혀 있던 한 교우를 찾아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비르짓다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일 때에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거든요.”

71. 최봉한 프란치스코 (?∼1815. 5월경(음), 충청도 홍주-경상도 대구, 옥사)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안드레아)과 구성열(바르바라) 부부는 그의 장인과 장모였다. 그는 이후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해 살던 중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과 누이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의 부친은 이 무렵에 사망하였다.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정약종의 집에 살면서 황사영(알렉시오) ․ 최필공(토마스)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동정을 지키며 살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친척들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서석봉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가족들을 데리고 장인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경주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장모 구성열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끊임없이 그녀를 권면하였다. 대구로 이송된 후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결국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1815년 5월경(음력)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는 30세가 갓 넘었었다.

48. 최여겸 마티아 (1763∼1801. 8. 27, 전라도 무장-전라도 무장, 참수)
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일찍이 윤지충(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 결혼한 뒤에는 이존창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마티아는 일단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되어 무장, 전주 감영으로 차례로 이송되었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심한 신자 한정흠(스타니슬라오)과 김천애(안드레아)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어 며칠 후 그곳 개갑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6. 최인길 마티아 (1765∼1795. 6. 28, 한양-한양 포도청, 장사)
1765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세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이냐시오)은 그의 동생이다.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후 마티아는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마침내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 초 마티아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마티아는 이때부터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안되어 한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 신부는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 나와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인길은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과 지황(사바)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마티아의 나이는 31세였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져 버렸다.

38. 최인철 이냐시오 (?∼1801. 7. 2,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철(崔仁喆) 이냐시오는 교회 창설 초기에 형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1795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최인길(마티아)이 그의 형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형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다. 최인길과 몇몇 신자들은 이에 굴복하였지만,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늙은 어머니와 형제들은 호소에도 신앙을 증거하였으나 임금의 회유를 받아들여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석방되었다.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깊게 뉘우쳤다.
형이 순교한 뒤 더욱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주문모 신부가 위험할 때마다 그 피신을 돕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언하였다. 이에 따라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이었다.

101. 최조이 바르바라 (1790∼1840. 1. 4, 경기도 여주-전라도 전주, 참수)
최조이(崔召史) 바르바라는 1801년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그녀는 부친이 순교한 뒤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장성한 뒤 바르바라는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1827년의 정해박해 때는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적도 있었다. 이후 바르바라는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 살아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고, 미약하나마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 있던 홍재영(프로타시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전주로 압송된 그녀는 1801년에 순교한 최창주의 딸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고백하고 자신의 시아버지 신태보는 올 봄에 전주에서 순교하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22. 최창주 마르첼리노 (1749∼1801. 4. 25, 경기도 여주-경기도 여주, 참수)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으나,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이후 자신이 지은 죄를 깊게 뉘우쳤다.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1801년 여주에서 순교한 원경도(요한)와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한 신태보(베드로)가 바로 그의 사위들이다. 여주 지방에서는 1800년 부활 대축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한양으로 피신중에 순교를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체포되어 여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6개월의 옥중생활 후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그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하라는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17. 최창현 요한 (1759∼1801. 4. 8,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최창현(崔昌顯) 요한은 1759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입정동에서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최인길(마티아)은 비록 그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집안 아저씨뻘이 된다.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고  글을 잘 알았던 그는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는 그 후 지도층 신자들에 의해 총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동료들과 의논하여 성직자를 영입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이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처음에 그는 포도청으로 끌려갔으나,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었으므로 즉시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처음 문초 때에 일시 마음이 약해져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다시 용맹한 마음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20. 최필공 토마스 (1744∼1801. 4. 8,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1744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난 최필공(崔必恭) 토마스는 1790년에 사촌 동생인 최필제(베드로)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토마스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큰 열성을 보였다. 그는 공공연하게 교리를 전파하고 다녔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토마스는 몇몇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유혹에 굴복하여 석방된 후 토마스는 평안도 지방의 심약(조정에 올리는 약재를 검사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또 임금의 도움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3년 뒤, 그는 심약 자리를 사임하고는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8월에 다시 체포되어 문초를 받을 때에는 그는 용감하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이 토마스를 참수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임금은 이를 거부하고 그를 석방해 주도록 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인 12월 17일(음력), 형조에서는 그를 다시 체포하였다. 이틀 후에는 동생 최필제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최필공 토마스는 이후 이전의 행실 때문에 누구보다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사형장에서 첫 번째 칼날이 그의 목을 비켜가면서 피가 손으로 흐르자 토마스는 이것을 보면서 “보배로운 피”라고 외쳤다. 이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26. 최필제 베드로 (1770∼1801. 5. 14,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최필제(崔必悌) 베드로는 1770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약국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는 1801년에 순교한 최필공(토마스)의 사촌 아우로, 1790년에 그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사촌인 최필공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고 석방되었다. 또 석방된 후에는 거짓으로 최필공의 자백서를 써서 관청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0년 12월 19일(음력) 자신의 집에서 신입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에 체포되어 형조의 옥에 갇혔다. 그의 늙은 부친은 놀란 나머지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의 부친은 비신자였는데, 죽을 때는 영세를 받았다고 한다.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허가받고 옥에서 나오게 된 그는 장례를 치른 뒤 곧바로 형조로 가서 다시 옥에 갇혔다.
그때 형조의 관리들은 그에게 넌지시 도망할 것을 귀띔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옥으로 돌아오기에 앞서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순교의 원의를 나타냈다.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95. 최해성 요한 (1811∼1839. 9. 6, 충청도 홍주-강원도 원주, 참수)
최해성(崔海成) 요한은, 1839년에 순교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이다. 그의 집안은 본래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았는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그 지방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도 이곳이다. 이후 그는 좀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그는 그 마을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해성 요한은 우선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쇠도리깨로 그를 때리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원주 관장 앞으로 끌려간 요한은 수없이 많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옥으로 돌아온 요한은 일시적으로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의 발아래 엎드림으로써 인성의 나약함을 억누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839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하]

62. 한덕운 토마스 (1752∼1802. 1. 30, 충청도 홍주-광주 남한산성, 참수)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1800년 10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재영은 그 후 다시 신앙을 되찾아 1839년에 순교하였다. 또 그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39. 한신애 아가타 (?∼1801. 7. 2, 충청도 보령-한양 서소문 밖, 참수)
한신애(韓新愛) 아가타는 충청도 보령에서 양반의 서녀(庶女) 출신으로, 장성한 뒤 한양에 살던 조례산의 후처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다가 1795~1796년경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전교 덕택으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강완숙의 집을 왕래하면서 정복혜(칸디다) 등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고, 1800년 여름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아가타는 그 동안 다른 가족과 종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에 입교시키지는 못하엿다. 김연이(율리안나)를 비롯하여 많은 여성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강완숙과 함께 여성 공동체를 이끌어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형조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다. 그런 다음 강완숙 ․ 김연이 등 동료 8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46.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1756∼1801. 8. 26, 전라도 김제-전라도 김제, 참수)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때문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유항검과 함께 그 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한 신자 김천애(안드레아)와 최여겸(마티아)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명에 따라 그는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20. 허인백 야고보 (1822∼1868. 9. 14, 경상도 김해-경상도 울산, 참수)
허인백(許仁伯) 야고보는 1822년 경상도 김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다가 25세 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으며, 이후로는 아주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여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아내 박조이와 자식들에게도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정결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남매처럼 살았으며, 고신극기와 애긍에 힘써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많이 도와 주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난 뒤 그는 체포되어 무수히 매를 맞고 언양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옥에 갇혀 50여 일을 지낸 뒤 경주로 이송되었으며, 8개월간 옥에 갇혀 지내다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그는 울산의 죽령(현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산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양등(베드로) 회장과 김종륜(루가)을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고, 나무 그릇을 만들어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주 순교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2년 뒤인 1868년에 죽령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경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경주 진영에서 문초 후 동료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 장대(將臺, 현 경남 울산시 병영동)로 끌려 나가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과 함께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순교 당시에 그는 십자 성호를 긋고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고 하며, 그의 시신은 형장까지 따라온 아내에 의해 거두어져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55. 현계흠 바오로 (1763∼1801. 12. 10,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현계흠(玄啓欽) 바오로는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많은 역관을 배출했으나, 그는 역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약국을 운영하며 살았다. 1846년의 순교자 성 현석문(가롤로)은 그의 아들이며, 1839년의 순교자 성 현경련(베네딕타)은 그의 딸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된 후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그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손경윤(제르바시오), 김이우(바르나바), 정인혁(타대오) 등과 함께 자주 신앙 집회를 가졌고,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주문모 신부가 박해로 피신을 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집은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6회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이요 비밀 집회소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온 일가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황사영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게 되자, 의금부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19. 홍교만 F. 하비에르 (1738∼1801. 4. 8, 한양-한양 서소문 밖, 참수)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 출신으로 훗날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해오고 있었으며, 그도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홍인(레오)은 그의 아들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철상(가롤로)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양근에 사는 고종 사촌 권일신의 집을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런 다음 비신자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고,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더 깊이 교리를 연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치기도 하였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열성 때문이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사돈 정약종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에게 발각되어 피신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2월 14일 즉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사형을 선고를 받고 정약종, 홍낙민(루가) 등과 함께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21. 홍낙민 루카 (1751∼1801. 4. 8, 충청도 예산-한양 서소문 밖, 참수)
홍낙민(洪樂敏) 루가는 1751년 충청도 예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충주와 한양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1776년에는 양근의 유명한 학자 권철신의 제자가 되었으며, 178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1839년의 순교자 홍재영(프로타시오)은 그의 아들이다. 그에 앞서 그는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또 한때는 지도층 신자의 일원으로서 다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적도 있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난 뒤, 그는 임금의 명에 따라 천주교 신앙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다. 을묘박해가 일어나 체포되자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도 모시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멀리한 것처럼 보였다.
2년 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루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후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두려운 나머지 처음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 루가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하여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용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증거한 후 동료들과 함께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61. 홍익만 안토니오 (?∼1802. 1. 29, 경기도 양근-한양 서소문 밖, 참수)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을 전후하여 한양의 송현으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의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서(庶) 동생이요,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그는 1785년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가 교회 서적을 빌려 읽었으며,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796년 그는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 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하였다. 당시 그의 집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요 집회소였던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고백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64. 홍 인 레오 (1758∼1802. 1. 30, 한양-경기도 포천, 참수)
홍인(洪鏔) 레오의 집안은 본래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으나, 그의 부친이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한양에서 순교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바로 그의 부친이다. 그의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91년경 그의 부친이 양근 땅에 살던 고종 사촌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그는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부친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부친과 함께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서(庶) 5촌 당숙인 홍익만(안토니오), 황사영(알렉시오)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부친과 같이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종의 책 상자를 받아 집안에 숨겨두었다가 그들 부자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부친 홍교만은 한양으로, 그는 포천으로 각각 압송되었다가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그에 앞서 그의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된 지 얼마 안 되어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홍인도 그 뒤를 이어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100. 홍재영 프로타시오 (1780∼1840. 1. 4, 충청도 예산-전라도 전주, 참수)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루가)은 그의 부친이요,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토마스)는 그의 아들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또 장성한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교회 활동에 참여하거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체포된 후, 배교한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한 동안 냉담 생활을 하였다가 어느 날 은총의 힘으로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1832년 조정에서 유배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자, 광주 관장은 마음을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였으나 이러한 유혹을 물리쳤으며, 이후에도 그대로 광주에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그의 집을 찾아와 함께 있던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광주의 관장은 문초를 하고 전주로 이송시켰으나 전주 감사는 그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프로타시오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1840년 1월 4일(음력 1839년 11월 30일)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50. 홍필주 필립보 (1774∼1801. 10. 4, 충청도 덕산-한양 서소문 밖, 참수)
홍필주(洪弼周) 필립보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790년경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러나 계모 강완숙(골롬바)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을 실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들 필립보가 입교한 뒤로는 자신이 이해한 교리를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필립보 또한 어머니의 열심한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부친 때문에 고향집에서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워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1795년 5월에 어머니 골롬바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신부의 복사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또 홍익만(안토니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이후 그는 자신의 집이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자, 주 신부와 신자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이곳저곳으로 집을 옮겨다녔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와 그를 비롯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형벌이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차츰 약해졌을 때 어머니 골롬바의 권면으로 즉시 마음을 돌이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후 어머니는 먼저 순교하였지만,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고통을 받다가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10월 4일(음력 8월 2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63. 황일광 시몬 (1757∼1802. 1. 30, 충청도 홍주-충청도 홍주, 참수)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黃日光)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1800년 2월 그는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종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그 후 정약종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건하게 참아냈다. 그 결과 그는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고 고향으로 보내 참수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어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32 최양업   증거자 최양업 신부 ‘가경자’로 선포 16·05·13 1632
31 2차 시복대상 81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 심사, 본격 가동 15·08·27 1631
30 124위 복자   124위 한국 순교 복자 호칭 기도 15·05·10 1937
29 124위 복자   124위 복자 124위 초상 14·12·15 2230
28 2차 시복대상 81위   2차 시복대상자 :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13·07·04 2974
27 2차 시복대상 133위   2차 시복대상자 :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07·04 3224
26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명단 13·01·12 5045
25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가] 13·01·12 3318
24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나∼사] 13·01·12 3621
23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아] 13·01·12 3387
22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자∼하] 13·01·12 3170
21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기도문 13·01·12 3386
20 124위 복자   하느님의 종 125위 명단 13·01·12 4549
19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가] 13·01·12 5526
18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마∼사] 13·01·12 3564
17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아] 13·01·12 7740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자∼하] 13·01·12 4325
15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서한 일람표 12·12·16 3860
14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3번째 (마닐라/주산/상해에서) 12·12·16 4068
13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4-7번째 (요동 백가점에서) 12·12·16 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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