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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103위 성인 | 124위 복자 | 김대건 | 최양업 | 2차 시복대상 133위 | 2차 시복대상 81위 |
김대건 : 김대건 신부의 편지 : 4-7번째 (요동 백가점에서)
 paxkorea    | 2012·12·16 15:57 | HIT : 3,705 | VOTE : 549
● 김대건 신학생의 네 번째 편지
발신일 : 1842년 12월 9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요동에서.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우리가 아직 마닐라에 있을 때 신부님께 편지를 올렸으나 그 동안에 있었던 우리 여행에 대하여 보고를 드리려고 신부님께 다시 편지를 올립니다.
마침내 우리는 마닐라를 떠나 순풍에 따라 항해하여 대만섬까지 다다랐으나, 거기서부터는 작은 폭풍우와 역풍을 만났습니다.
신부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섬은 길이가 6백 리로서 초목과 산림이 울창하고 경치가 매우 좋을 뿐 아니라 토지도 매우 비옥하게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높은 산들도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흰 눈이 덮여 있습니다.
이 섬의 주민들은 특유한 방언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가 우리에게 생선을 팔려고 다가왔는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섬을 떠나 며칠 지나서 주산에 덫을 내렸습니다. 주산은 산이 많고 메마른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시내 구경도 하고 또 얼마 전에 부임하신 라자리스트회 신부님들을 만나볼 겸 해서 주산 시내에 몇 번 들어갔는데 원주민 외에는 신기한 것은 하나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을 ‘검은 악마’라고 부르고 멸시하여 왕처럼 손에 지팡이를 잡고 겁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산에서 약 두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동안에 영국인들이 남경을 탐험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므로 우리도 그들을 따라 4일 걸려 양자강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강 중간에는 숭명(崇明)이라는 상당히 큰 섬이 있는데 갈대와 초목과 숲이 빽빽이 우거지고 주민도 많으며 섬 이름과 같은 도시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작은 개울이 사방으로 흘러서 대체로 푸르러고 쾌적하며 비옥한 평야입니다. 강 오른쪽에 두 개의 도시가 있는데, 하나는 보산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오송구라고 합니다. 오송구는 양자강 황해 어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도시는 영국군의 공격으로 주민들은 모두 피난하여 텅 비었고 전투 때문에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오송구 방면에서 운하라는 말이 더 맞는 두 개의 강이 양자강으로 흘러드는데 작은 것은 운조방이라고 하고, 큰 것은 황포강이라고 합니다. 황포강은 상해 시내를 통과합니다. 상해는 해안에서 40리 떨어져있는 도시로 영국인들에게 개항된 항구 중 하나입니다.
7월 하순에 영국군이 남경을 점령하려 진격한 지 약 15일 후, 중국 제2급 도시인 진강부에 도달하여 단시일에 함락시키고 요새에 군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백 명 이상의 영국 군인과 3천 명의 달단 군인이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달단군의 장군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가 불을 질러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타 죽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에 우리는 출발할 날을 고대하며 오송구에서 퍽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실 함장이 남경시를 구경하기를 원해서 중국 배 한 척을 임대하였는데, 에리곤호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가지고 3명의 장교와 선원들을 데리고 출발했는데 저는 통역관으로 따라갔으며 메스트르 신부님은 에리곤호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출발한 지 약 6일 만에 진강부에 도착하여 하루 동안 도보로 시가지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였는데, 전쟁으로 파괴되고 강도들의 습격으로도 약탈되어 폐허가 된 시가지는 사방에서 악취가 났습니다.
시가지는 두 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달단인들의 거주지였고, 하나는 중국인들의 거주지였습니다. 이것은 양자강 오른쪽에 건설되어 있고, 맞은편에서는 중국인들이 운량호라고 부르는 제국운하가 흐르는데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한 주요한 수문이 9개나 있다고 합니다.
진강부와 제국운하 사이에 금산, 즉 금으로 된 섬이라고 부르는 중국인들에게 매우 유명한 섬이 있습니다. 초목이 울창한 그 섬에는 황제 두 명의 무덤과 황제 직할의 절과 고대로부터 유명한 제국 도서관이 있답니다. 전쟁 전에는 그 절에 3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다시 닻을 올리고 떠나 남경에 가서 닻을 내렸습니다. 남경 시가지는 파괴되지 않고 멀쩡하였으며 영국인과 중국인이 강화조약을 맺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눈앞에 당도한 영국군의 병력과 위협에 중국인들은 대경실색하여 강화를 청 하였던가 봅니다.
황제는 4명의 고관대작에게 이 강화조약을 체결하도록 위임하여 8월 29일에 강화 회담을 마치고 조약문에 조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고 단정하는 중국인이 많습니다.
신부님도 아시겠지만 남경시에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탑이 있는데, 장교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가기에 저도 그들을 따라가서 탑과 시가 전체를 구경하였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남경은 인구가 백만 명이라고 하는데 아주 평탄하며 두 개의 운하로 구분되어 있고, 도시는 크고 넓지만 아름답지는 못합니다. 도시 북쪽에 산이 있는데 그곳에 영국군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보인사(寶印寺)라고 하는 절 가운데 높이가 2백 척이나 되는 탑이 세워져 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의 돌과 도금한 돌로 되어 있고 그 돌 위에는 여러 신의 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탑의 외부는 여러 가지 색깔의 기와로 입혀져 있는데 그 모양은 팔각형이고 백50개의 작은 종들과 두 개의 금 구슬이 있고, 그 밖에도 눈에 확 띄는 등이 12개나 달려 있습니다. 이 등들 덕분에 위로는 33천(天)을 비추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비추어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을 분간한다고 중국인들은 믿고 있습니다.
탑의 맨 꼭대기에는 중량이 9백 근이나 되는 질그릇 단지 두 개와 천반(天盤), 즉 하늘의 접시라고 하는 4백 50근이나 되는 접시가 있습니다. 탑이 광채로 온 세상을 비춘다고 믿고들 있습니다. 탑의 기단에는 여러 겹의 둥근 원이 있는데 그 무게가 3천 6백 근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탑을 다섯 가지 보석으로 꾸몄는데 그것들은 각각 밤을 비추는 야명주(夜明珠), 비를 쫓는 비수주(備水珠), 화재를 막는 비화주(備火珠), 폭풍우를 피하는 비풍주(備風珠), 먼지로부터 탑을 보호해주는 비진주(備塵珠) 등으로 불립니다.
그 밖에 또 중국인들의 거룩한 책(經典) 3권이 보관되어 있는데 비교(秘敎)의 책인 「장경(藏經)」, 기도서인 「아미타불경(阿彌陀佛經)」, 부처님 경배 권유서인 「제인불경(濟人佛經)」이라는 것입니다.
이 절과 탑의 기초는 대략 2천 년 전에 세워졌답니다. 처음에는 탑의 이름을 고이왕 탑이라고 불렀다가 체우라는 황제가 즉위 제3년에 퇴락한 절을 보수하여 견초사, 즉 첫째 절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카오라는 사람이 절을 쇠붙이로 파괴한 것을 진왕조의 키엔운 황제가 재건하여 창건사(創建寺)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러나 제20대 왕조인 원(元)에 이르러서 황재로 전소된 채 있다가 제21대 왕조인 명(明)의 영락 황제가 예전의 상태로 제건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청(淸)까지 22개의 왕조가 있었습니다.
그 절을 재건하는 데 19년이 걸렸는데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탑을 세우는 데만 거의 4백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합니다. 그후 카친 황제 때에 탑의 3분의 1이 벼락으로 무너졌었는데 근래에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관광을 마치고 오송구로 돌아오는 도중에 우리가 고대하던 파보리트호(프랑스 군함)를 만났습니다. 그 배로부터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그의 두 동행인 토마스(최양업)와 범 요한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괴로움을 한꺼번에 느꼈습니다. 우리가 모두 모였으니까 즐겁기는 하나 우리의 사정이 더욱 곤란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또한 서글펐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가 에리곤호(프랑스 군함)에 도착하여 보니까 신부님들이 범 요한으로 하여금 브뤼니에르 신부님을 안내도 하고, 베롤 주교님(1838년에 신설된 만주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 주교)에게로 가는 짐에 대한 처리도 하도록 상해의 신자들한테 심부름을 보냈는데 그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실 함장이 조금 있다가 출범할 것이라고 똑똑히 말하였지만 하루 종일 범 요한을 기다렸어도 허사였고 속히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은 부득이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가 여행 보따리를 맡아가지고 육지에 내려서 범 요한의 귀환을 기다리게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마는 실행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비하신 안배로 다행히 우리와 오래전부터 친밀히 교제하였던 황세흥이라는 해변에 거주하는 외교인이 에리곤호 출항 전날 저녁에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하여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는 거의 동의를 얻어 여행 보따리를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가 있기로 하였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예정한 대로 에리곤호로 우리의 선교지인 조선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으나 세실 함장은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가는 항해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이 질문하니까 그는 자기가 조선을 향하여 항해하기는 하겠으나 만일 항해 중에 어디서든지 역풍을 만나면 곧바로 마닐라로 뱃머리를 돌릴 것이라고 조건부로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딱한 형편에 처해 있었으므로 메스트르 신부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우리가 마닐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봐 근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세실 함장이 돛을 펴서 출범하려 할 때에 마침 범 요한이 돌아와 당시 상해 근처에 체류하던 산동지방의 강남 직할서리구장이신 존경하올 베지 주교님께서 짐 보따리에 대해 조치하신 경위를 신부님께 보고하였습니다. 그 보고를 듣고 신부님은 더 안전한 편을 취하기로 하고 저와 함께 황세흥씨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범 요한과 토마스를 데리고 그 근처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 군함을 타고 의복을 변장하여 베지 주교님께로 급히 갔습니다.
우리는 그 외교인 집에 5일 동안 묵은 다음에 같은 군함에 올라가서 숙박을 청하니 그들은 우리를 매우 환대하였습니다. 하루를 지낸 후 우리는 주교님께로 가서 환대를 받았고 주교님의 알선으로 어떤 신자의 배를 타고 약 15일을 걸려 우리가 향하여 가던 태장하(太莊河)에 입항하였습니다. 이 항해 중에 역풍으로 두세 번이나 출범하였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 외에는 별로 역경은 없었습니다.
일을 주선하도록 범 요한을 교우촌에 심부름 보냈더니 그는 거기에 머물고 두(杜) 요셉이라는 교우촌 회장을 우리한테 보내왔습니다. 신부님들은 밤에 군함에서 내려 상륙하기로 작정하셨으나 주위환경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낮에 교우촌 회장을 따라 상륙하였고, 짐 보따리는 다른 배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떤 외교인들이 신부님들을 보고 유럽 사람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세관에 가까이 갔을 때 안내자는 여러 가지 귀찮은 질문을 피하고 싶어서 우리에게 강변에 내려서 검문 장소를 슬그머니 지나가도록 권하였습니다.
그곳은 물이 빠진 지 얼마 안 되어 대단히 질퍽거렸는데 세관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한편 두 요셉은 토마스를 데리고 일을 처리하러 세관으로 곧장 갔습니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님, 브뤼니에르 신부님, 두 명의 선원과 저, 이렇게 다섯 명이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우리가 질퍽하고 길도 없는 강변에서 허둥거리는 것을 보고 한편에서는 신부님들을 영국인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20 여명이 고함을 치며 우리한테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손님 안내자였는데 우리는 그들을 경찰관인 줄로 여겨 겁이 났습니다. 사실 그들 중에는 경찰관도 몇 명 있었습니다.
장소 관계로 조금 떨어져 있던 선원들에게 제가 귓속말로 신부님들 곁으로 가까이 가라고 말했지마는 그들은 무서워서 안색이 변했고 고개도 쳐들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붙잡으며 여러 가지로 힐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곧장 걸어갔습니다. 저는 우리가 소매 속에 감추어 가지고 가던 책 때문에 매우 걱정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붙잡고 힐문하였으므로 제가 화난 목소리로 “당신네들은 안녕질서를 위하여 정부에서 임명한 경찰관이면서 무고한 인민을 모욕적으로 대한다.”고 꾸짖었더니 그들은 우리를 내버려 두고 떠나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옥신각신하고 있는 동안에 두 요셉 회장과 토마스는 우리가 체포되어 법정에 끌려가는 줄로 짐작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우리는 수레를 타고 요셉의 집에 다다랐으나 두씨 가족 외에 다른 신자들은 모두 신부님들을 맞이하기를 꺼려했습니다. 베롤 주교님이 그들 집에 유숙하는 것도 그들은 원하지 않았으니만큼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범 요한과 토마스는 개주(蓋州) 근처 교우촌으로 갔고,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어떤 과부의 작은 집을 세내어 머물면서 조선으로 출발할 날과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선에 대한 확실한 소식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베롤 주교님한테서 변문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연락원은 외교인 상인들한테서 탐문하여 알아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연락원이 조선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말하더라고 합니다.
“2명의 외국인이 3백 명의 조선인과 함께 잡혀 다 같이 사형을 받았고, 왕의 통역관 유 아우구스티노(劉進吉)는 이 불행한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참수된 후 그의 시체는 여섯 갈래로 찢겨 새들의 밥이 되었으며, 그의 온 가족이 멸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째서 그 외국인들과 조선인들이 학살되었느냐고 연락원이 다시 물으니까 그 외국인들은 3개 국어, 즉 조선말, 중국말, 서양말과 글에 정통한 자들로서 나쁜 종교로 조선 사람들을 부패시켰기 때문에 학살 되었으며 조선인들은 사악한 종교를 받아들여 그 서양인들을 추종하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연락원이 세 번째로 질문하니까 그들은 대답하려 하지 않더랍니다.
그 밖에도 신부님들이 체포된 것은 거짓 신자에 의하여 밀고 되었기 때문이라고 연락원이 보고하였습니다. 그 거짓 신자는 신부님들의 얼굴을 익혀두려고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신부님한테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이 불확실한 가운데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12월 20일을 기하여 조선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연락원들과 다른 여러 사람들은 이 계획이 무모하고 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단언하면서, 조선과의 연락은 하느님께서 큰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하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하며 우리의 계획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우리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계획하고 있느니만큼 조선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만 하다면 무슨 위험인들 마다하겠습니까.
더구나 메스트르 신부님의 출발은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닙니다. 신부님은 저에게 더 큰 어려움이 보태지지 않도록 저와 동행하기를 주저하고 계십니다.
스승님도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위험이 없지 않고 또한 주위상황과 저의 무능과 허약함이 이 위험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은혜로 위험 속에서도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행에 필요한 물건은 벌써 다 준비되었고, 의복과 신발은 할 수 있는 대로 같이 묶어두었습니다. 조선에 들어갈 대는 더 쉽게 잠입하고 악마의 심부름꾼들 편에서 우리를 덜 주목하도록 거지로 위장할 작정입니다.
이곳은 모든 분들이 다 안녕하시고 저도 허약하나마 그럭저럭 건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만 편지를 끝내면서 스승님께 의지하는 이 작은 아들을 하느님과 성모님 대전에 항상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조선에 들어간 후에 저에게 닥칠 모든 사항에 대하여 신부님께 편지를 올리겠습니다.
지극히 좋으시고 공경하올 신부님, 내내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부당한 아들 조선인 김 안드레아가 인사드립니다.

추신 : 이 편지를 다시 뜯고 새 소식을 추가합니다.
저는 매일 메스트르 신부님한테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으며, 토마스는 만주에서 페레올 주교님 곁에 있습니다.
저는 요즘 프랑스어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이 유럽에서 온 서신을 받으시고 저에게 프랑스어 공부를 전적으로 포기하도록 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어 회화는 저에게 분명히 유익하지 않습니다마는 에리곤호에 오랫동안 타고 있었기에 약간은 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프랑스어 독서는 저에게 무익하다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애써서 배운 프랑스어 독서를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듯합니다.
만일 제가 불라사전(佛羅辭典)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프랑스어 책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떠나올 때 리부아 신부님이 저에게 프랑스어 책을 주셨는데 그 가운데서 몇 권은 메스트르 신부님의 분부로 버렸습니다.
토마스는 프랑스어 책들을 읽을 허락을 받았는데, 그 프랑스어 책들은 그가 마카오에서 떠나올 때 리부아 대표 신부님이 유럽에서 온 서신을 받은 후 불라사전과 라불사전과 함께 주신 것입니다.


● 김대건 신학생의 다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2년 12월 21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리부아 신부
(네 번째 편지와 다섯 번째 편지는 일부 내용이 중복되어 있다. 그러나 편지를 받는 분이 다르다.)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백가점에서
우리는 계획한 대로 에리곤호를 타고 우리의 선교지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신부님께 알려드렸으리라 생각됩니다마는 아주 엉뚱한 다른 일들이 연거푸 일어난 뒤에 우리는 산동 대목구장이며 강남 직할서리구장이신 존경하올 플로렌티노 베지 주교님께로 인도되었습니다.
우리는 주교님으로부터 아주 환대를 받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신자의 배를 마련하여 주셔서 약 보름이 걸려 우리가 목적했던 태장하 항구에 다다랐습니다. 이 항해는 순조로워 아무런 역경도 당하지 않았고 다만 북풍이 우리의 항진을 더디게 하였을 뿐입니다. 배 안에서는 네 사람 외에는 모두 신자들이어서 이들은 우리를 잘 대우해 주었고 신부님들께서는 매일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범 요한은 일을 주선하도록 요동 교우촌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거기에 머물고 그 대신에 두 요셉이라고 하는 교우촌 회장을 보내왔습니다. 공경하올 신부님들과 우리가 계획한 대로 신부님들을 밤중에 인도하려고 하였으나 그때의 주변상황이 이를 허용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이 환히 밝은 후에야 외교인들의 작은 배로 짐을 보내고 우리는 두 셉의 안내로 배에서 내렸습니다. 짐을 운반하기 위하여 두 명의 선원이 우리 배에 올라탔는데, 그들이 미소를 짓고 계시는 신부님들을 보고 서양 사람인 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가 세관에 접근하였을 때 두 요셉은 저에게 방금 물이 빠져서 대단히 질퍽거리는 강변에 신부님과 함께 내리도록 귓속말을 하였습니다. 그곳은 세관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신부님들이 세관에서 봉변을 당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토마스(최양업)와 함께 세관으로 직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브뤼니에르 신부님, 두 명의 선원 그리고 저까지 다섯 명이었는데, 모두 진흙에 발이 빠졌고 길도 아닌 곳을 허둥대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외교인들은 신부님들을 보고 영국인이라고 떠들었습니다.
잠시 길을 걷고 있을 때 세관 쪽에서 30명 가량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고함을 치면서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찰관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경찰관도 있고 손님의 안내자도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걸어가시고 그들은 오랫동안 힐문하여 우리를 괴롭힌 후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백가점이라 불리는 교우촌으로 길을 재촉하였고 두 요셉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촌락은 바다에서 60리 가량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신자들이 2백 명 가량 살고 있는 곳입니다.
두 요셉의 가족 외에는 이곳 신자들은 신부님을 영접하기를 꺼리며 더구나 신부님을 쫓아내려고 음모를 꾸미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롤 주교님이 그들 집에 머무시는 것도 그들이 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인심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여 주교님과 신부님들에게 불쾌한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만일 편지지가 넉넉하다면 신부님께 그런 사정을 전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브뤼니에르 신부님은 토마스와 함께 개주 부근에 있는 양관(陽關)이라는 교우촌에 계시고 메스트르 신부님은 저와 함께 어떤 과부의 조그마한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온 소식에 대하여는 신부님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다만 존경하올 베롤 주교님이 변문에 파견한 연락원이 외교인들한테서 얻어 듣고 돌아와 주교님께 보고한 바를 전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조선어와 중국어와 서양어에 능통한 두 명의 외국인이 종교를 이유로 조선인 3백 명과 함께 참수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 아우구스티노는 그렇게 엄청난 범죄의 주모자로서 죽음을 당하고 그의 시체는 여섯 조각으로 찟겨 새들의 밥이 되었으며 그의 모든 가족은 멸족되었다 합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신부님들은 거짓 신자로부터 밀고 당하였다 하며 그자는 신부님 얼굴을 익히려는 의도에서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공경하올 베롤 주교님과 메스트르 신부님의 계획대로 조선으로 갈 출발일을 12월 22일로 정하였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은 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고자 하였으나 스승님도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위험이 없지 아니하므로 존경하올 베롤 주교님께서 저에게 어려움이 더 커질까 염려하여 메스트르 신부님의 동행을 금하셨습니다.  
만일 직접 대면하여 말씀드릴 수 있다면 아직도 스승님께 드릴 말씀이 많으나 편지로 이 모든 사정을 일일이 적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멈추고 공경하고 경애하올 스승님께 이 작은 아들을 기도 중에 항상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순명하는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절합니다.

백가점에서 1842년 12월 21일

새 소식을 추가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개봉하였습니다.


● 김대건 신학생의 여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3년 1월 15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여섯 번째 편지와 일곱 번째 편지의 일부 내용이 중복되어 있으나 편지를 받는 분이 다르다.)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저는 계획대로 12월 23일에 떠나 나흘 후에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변문에서 멀지 않는 곳을 지나가다가 길에서 굉장히 큰 무리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선 임금님의 사신 일행을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그 일행 중에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의 연락원이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제가 그에게 신자냐고 물었더니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온 중국인 안내자들을 멀리서 뒤따라오게 하고 그를 따라가면서 우선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보면 신부님들은 종교의 이유로 살해되었고 2백여 명의 신자도 처형되었는데 그들 중에 대다수가 지도급 인사였다고 합니다.  
저의 형제 토마스(최양업)의 부모도 살해되었는데 부친(최경환)은 곤장으로, 모친(이성례)은 칼을 받아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 역시 많은 고난을 당하여 부친(김제준)은 참수되었고, 모친(고 우르술라)은 의탁할 곳이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 집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프란치스코가 저에게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으나 여기에 다 기록하기에는 너무 장황할 것 같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앵베르) 주교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배신자와 포졸들의 수색을 받으시어 수원이라는 곳에 은신하셨는데 유다(김여상)가 지옥의 심부름꾼들을 거느리고 그곳에 당도하자 주교님은 쉽사리 더 피신할 수 없음을 아시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가시어 재판소로 끌려 가셨다고 합니다.  
(모방, 샤스탕)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전멸될 것이라는 말을 주교님이 들으시고 편지를 보내어 두 분 신부님을 서울로 불러 올려 다 같이 한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 합니다.
오!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로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다 삼켜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요새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고는 있지마는 신부님들이 안 계시어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답니다.
근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주요한 배반자가 된 김여상은 사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사형 이유는 그가 흉악한 인간으로서 남들을 공적으로 해친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는 듯합니다.
다른 사람 하나(김대건의 매부)는 아내의 부모를 신고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교살 당하였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많은 신자를 체포한 포도대장도 짐작하건대 남에게 불의한 짓을 저지른 탓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후 사형을 받았다고 말들 합니다.
주변 상황이 허락지 않아서 그 밖의 소식을 더 오래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을 인도하기 위하여 변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외교인들의 의혹과 박해의 위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외교인 친구들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중국에 들어가 북경까지 갈 수 있는 허락을 얻어 사신 일행의 명단에 올라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저에게 인내심을 가지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신부님의 입국에 대하여 다른 신자들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전력을 쏟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님들이 1년 후에야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2월쯤에 신부님을 인도할 마음으로 곧 조선에 들어갈 여행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에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에게 어느 누구라도 조선에 입국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잘라 말하면서 오직 유일한 방법은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만 입국할 수 있을 듯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쯤 듣고 나서 그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받아가지고 그와 작별한 후 변문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지냈습니다. 이튿날 새벽 1시쯤 일어나 조선옷을 갈아입고 중국인 안내자들을 작별한 후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멀리 보였습니다. 과연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죄어드는 듯 하였습니다. 특히 나무할 칼을 잊어버리고 변문에 놓고 왔기 때문에 더욱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달아드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하여 갔습니다.
성문에는 군인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통행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끼여 지나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군인이 저에게 통행증을 요구하는 차례가 되었을 때 세관원들한테로 갔습니다. 저는 요행이 몸집이 큰 소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관에서는 여행자들에게 한 명씩 세관장 앞으로 나아가 성명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웠으므로 불을 켜놓고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관장 외에도 다른 세관원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서서 아무도 달아나지 못하도록 두루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어떻게 처신하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미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기에 저는 슬그머니 그들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제 등 뒤에서 세관원이 저를 부르며 통행증도 내지 않고 가느냐고 호령하였습니다. 그가 연거푸 저를 부르기에 저는 통행증을 벌써 내주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저를 뒤쫓아오는 줄로 믿고 달아나 성 밖 변두리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저를 맞아줄 집이 한 채도 없었으므로 밤새도록 대략 백리를 걸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에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어떤 조그마한 주막에 들어갔더니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얼굴과 의복을 살펴보고 또 말소리를 들어보고 외국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제 머리를 살펴보고 제가 신은 중국 버선을 검사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저를 동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반대하여 제가 어디로 가든지 잡힐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백하고 또 조선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나의 근본이 변할 리 없다고 대답하고, 또 혹시 제가 잡힌다 할지라도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마음은 편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 저를 내쫓았습니다.
제가 조선의 수도 서울, 즉 한양으로 간다는 말을 하였기에 그들은 그런 줄로 알고 간교하게도 사람 하나를 보내어 제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포졸들의 손아귀를 피하기가 지극히 어려웠고, 만일 잡히는 경우에는 제 몸에 지닌 돈만 보더라도 도둑의 혐의를 받아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도둑은 국법에 의하여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정탐꾼이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로 서울 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 작은 주막을 멀리 피하면서 우회하여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는 감히 길에 나서지를 못하고 수목이 울창한 산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땅을 내리 덮었을 때 걸음을 재촉하여 새벽 2시쯤에 의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바다와 반대쪽, 즉 읍의 왼편으로 방향을 정하여 길도 없는 험악한 곳을 헤매었습니다. 이런 곳에도 사방에 지붕이 보이기에 저는 국경 수비대 막사로 여겼습니다.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해가 떠올라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 사이에 낀 황막한 들길을 걸었습니다. 여기는 낮동안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도중에 중국 의복으로 갈아입느라고 나머지 한나절을 소비하였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약 백리 길을 걷고 나니 해가 떠올랐습니다. 계속 길을 걸어 저녁때가 지나 변문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물건을 마련하고 5일 만에 백가점에 도착하여 공경하올 메스트르 신부님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3월에 프란치스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공경하올 신부님, 안녕히 계십시오.  
공경하올 스승님께, 순명하는 아들 김해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 김대건 신학생의 일곱 번째 편지
발신일 : 1843년 2월 16일
발신지 : 요동 백가점
수신인 : 리부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리부아 신부님께.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먼저 써넣은 편지를 아직 보내지 못하였으므로 새로 들은 소식을 추가하여 동봉합니다.
12월 23일에 메스트르 신부님이 안배하신 대로 4일이 걸려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에서 온 연락원 김 프란치스코는 벌써부터 변문에 도착하여 여러 날을 머무르면서 우리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인 안내자들이 오지 않을 줄로 알고 외교인 친구들의 호의와 후원으로 그들을 수행하여 중국에 들어갈 허가를 얻어, 북경으로 들어가는 일행 명단에 올라 조선 임금님이 보내는 사신 일행과 함께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변문에서 멀지 않은 길거리에서 사신 일행과 함께가는 그를 만났으나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8년 전에 단 한 번 서로 만나본 일이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에게 교우냐고 물었더니, 그가 자기는 교우이며 본명은 김 프란치스코라고 대답하였으므로 저도 그에게 비슷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게 북경행을 중지하고 변문으로 되돌아가서 선교사신부님을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인도하여 드릴 방도를 의논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면 외교인 동료들이 수상하게 여길 것이고, 따라서 박해의 위험이 없지 않으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장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같이 온중국인 안내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면서 우선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보면 신부님들은 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종교를 위하여 살해되었고 2백여 명이나 되는 신자가 살해되었는데, 그들 중 다수가 지도급 신자였다고 합니다. 저의 형제 토마스(최양업)의 부모도 살해되었는데 부친(최경환)은 곤장으로, 모친(이성례)은 칼을 받고 두분 다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도 역시 많은 고난을 당하여 부친(김제준)은 참수되었고, 모친(고 우르술라)은 의탁할 곳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 집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프란치스코가 저에게 이야기한 것이 매우 많으나 여기에다 기록하기에는 너무 장황할 것 같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앵베르 주교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배반자와 포졸들의 수색을 받으시어 수원이라는 곳에 은신하셨는데 유다가 지옥의 심부름꾼들을 거느리고 그곳에 당도하자 주교님은 쉽사리 더 피신할 수없음을 아시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가시어 재판소로 끌려 가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두 분도 자수하지 않으면 천주교인이라는 이름까지 전멸될 것이라는 말을 주교님이 들으시고 편지를 보내어 두 분 신부님을 서울로 불러 올려 다 같이 한날에 순교의 화관을 받으셨다 합니다.
오I 이분들은 참으로 찬란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얻은 후 황제의 붉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소로 개선 용사로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얼마나 불행한 땅입니까! 그렇게나 여러 해 동안 목자들을 여의고 외로이 지내다가 갖은 노력을 들여가며 가까스로 맞이한 신부님들을 일시에 모두 잃었으니 조선은 얼마나 불운합니까. 적어도 한 분만이라도 남겨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다 삼켜버렸으니 조선은 참으로 안타깝고 괘씸합니다.
요새는 박해가 멎어서 신자들은 조금 안정을 누리고 있지마는 신부님들이 안 계시어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탄식하며 방황하고 있답니다.
근년에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주요한 배반자가 된 김여상은 사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사형 이유는 그가 흉악한 인간으로서 남들을 공적으로 해친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는 듯합니다.
역사를 보아도 이따위 인물은 사형을 받고 매도 맞게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 하나(김대건의 매부)는 자기 아내의 부모를 신고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교살 당하였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많은 신자를 체포한 포도대장도 짐작하건대 남에게 불의한 짓을 저지른 맞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된 후 사형을 받았다고 말들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그에게 어째서 여러 해 동안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첫해(1839년)에는 배반자들의 음모가 무서워서 감히 생각도 못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연락원을 보냈더니 도중에서 객사하고, 두 번째 보낸 자는 변문까지 가기는 했으나 중국인 안내자를 아무도 만나지 못해서 그대로 되돌아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프란치스코가 변문에 와서 중국인 안내자를 아무도 만나지못해서 자기가 북경까지 들어갈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사정이 허락지 않아 그 밖의 소식을 더 오래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쯤 듣고 나서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온 편지들을 받아가지고 그와 작별한 후 변문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를 지냈습니다. 저는 신부님들이 1년 후에야 담당 선교지인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2월쯤에 신부님을 인도를 할 마음으로 곧 조선에 들어갈 여행 준비를 하였습니다. 제가 프란치스코에게 조선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국경을 통과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잘라 말하면서 오직 유일한 방법은 가난한 나무꾼 행세로만 입국할 수 있을 듯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튿날 새벽 1시쯤 일어나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조선옷을 갈아입고 중국인 안내자들을 작별한 후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얼마 안 가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숲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무슨 짐승이 가까이 오기에 생각하니 나무할 칼을 잊어버리고 변문에 놓고 왔기에 그곳으로 되돌아가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백30리 되는 길을 걸어가니 해가 넘어갈 무렵에 의주 읍내가 멀리 보였습니다. 과연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죄어드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달아드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하여 갔습니다.
성문에는 군인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통행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마침 변문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 끼여 지나갔습니다. 그곳에 있던 군인이 저에게 통행증을 요구하려는 차례가 되었을 때 세관원들한테로 갔습니다. 저는 요행히 몸집이 큰 소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관에서는 여행자들에게 한 명씩 세관장 앞으로 나아가 성명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웠으므로 불을 켜놓고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관장 외에도 다른 세관원 한 사람이 높은 곳에 서서 혹시 누가 달아나는가 하여 두루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어떻게 처신하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미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기에 저는 슬그머니 그들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제 등 뒤에서 세관원이 저를 부르며 통행증도 내지 않고 가느냐고 호령하기에 저는 귀먹은 체하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연거푸 저를 부르기에 "무슨 말씀이오. 통행증은 벌써 내드렸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이 저를 뒤쫓아오는 줄로 믿고 달아나 성 밖의 변두리로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저를 맞아줄 집이 한 채도 없었으므로 밤새도록 대략 백리를 걸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에 너무나 추워서 몸을 녹이려고 어떤 조그마한 주막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안에는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제 얼굴과 의복을 살펴보고 또 말소리를 들어보고는 외국 사람이라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정체를 알아보려고 제 머리를 살펴보고 제가 신은 중국버선을 검사하였습니다. 한 사람만 저를 동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반대하여 제가 어디로 가든지 잡힐 것이라고 떠벌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백하고 또 조선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나의 근본이 변할 리 없다고 대답하고, 비록 잡힌다 할지라도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마음은 편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 저를 집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제 말을 듣고 제가 조선의 수도 서울, 즉 한양으로 가는 줄로 알고 간교하게도 뒤로 사람을 보내어 제가 가는 방향을 정탐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포졸들의 손아귀를 피하기가 지극히 어려웠고, 만일 잡히는 경우에는 제 몸에 지닌 돈만 보더라도 도둑의 혐의를 받아 사형을 받게 될 염려가 있었습니다. 도둑은 국법에 의하여 모두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정탐꾼이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로 서울 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 작은 주막을 멀리 피하면서 우회하여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뜬 다음에는 감히 길에 나서지를 못하고 수목이 울창한 산속에 숨어 있다가 해가 떨어져 어둠이 땅을 내리덮었을 때 걸음을 재촉하여 새벽 2시쯤에 의주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바다와 반대쪽에 있는 읍 왼편으로 방향을 정하여 길도 없는 험악한 곳을 헤매었습니다. 이런 곳에도 사방에 지붕이 보이기에 저는 국경 수비대로 여겼습니다.
제가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해가 떠올라 사방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을 건넌 뒤에 황막한 들길을 걸었습니다. 여기는 낮 동안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길목이었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도중에 중국 의복으로 갈아입느라고 나머지 한나절을 다 소비하였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약 백리 길을 걷고 나니 해가 떠올랐습니다. 계속 길을 걸어 저녁때가 지나 변문에 도착하여 모든 사람이 비웃는 가운데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과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 몇 가지 물건을 마련하고 5일 만에 백가점에 도착하여 공경하올 메스트르 신부님에게로 되돌아왔는데 이날이 1월 6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3월에 프란치스코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사정은 신부님들의 편지를 보시면 더 자세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조선의 주요한 사람들이 편지를 보냈는데, 제 짐작에 그 편지를 신부님 앞으로 보냈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몰리 신부님께로 보낸 것입니다(몽고 선교지의 장상인 몰리 신부님 집에 모방 신부님과 조선 선교지 책임자인 앵베르 주교님이 머물고 계셨습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전에 정성껏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공경하올 스승님께, 순명하는 아들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32 최양업   증거자 최양업 신부 ‘가경자’로 선포 16·05·13 1079
31 2차 시복대상 81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 심사, 본격 가동 15·08·27 1169
30 124위 복자   124위 한국 순교 복자 호칭 기도 15·05·10 1390
29 124위 복자   124위 복자 124위 초상 14·12·15 1619
28 2차 시복대상 81위   2차 시복대상자 :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13·07·04 2505
27 2차 시복대상 133위   2차 시복대상자 : '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07·04 2769
26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명단 13·01·12 4015
25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가] 13·01·12 2821
24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나∼사] 13·01·12 3060
23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아] 13·01·12 2849
22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약전 : [자∼하] 13·01·12 2645
21 103위 성인   한국 103위 성인 기도문 13·01·12 2722
20 124위 복자   하느님의 종 125위 명단 13·01·12 3818
19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가] 13·01·12 3295
18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마∼사] 13·01·12 3016
17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아] 13·01·12 5887
16 124위 복자   한국 124위 복자 약전 : [자∼하] 13·01·12 3683
15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서한 일람표 12·12·16 3336
14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1-3번째 (마닐라/주산/상해에서) 12·12·16 3488
김대건   김대건 신부의 편지 : 4-7번째 (요동 백가점에서) 12·12·16 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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