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Home >> 교구별 성지 >> 서울대교구

TOTAL ARTICLE : 27, TOTAL PAGE : 1 / 2 회원가입 로그인
구분 서울대교구 | 춘천교구 | 대전교구 | 인천교구 | 수원교구 | 원주교구 | 의정부교구 | 대구대교구 | 부산교구 | 청주교구 | 마산교구 | 안동교구 | 광주대교구 | 전주교구 | 제주교구 |
서울대교구 : 이벽 세례자 요한의 집 터 :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식 터
테마 분류 :: 성지 지역 분류 :: 서울대교구 > 종로/중구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식이 거행된 수표교 이벽의 집 인근 기념표석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1754~1785)의 집에서 세례식이 최초로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가 성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2011년 8월 28일 기념표석을 세우고 이어 9월 26일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이벽의 집은 수표교 남쪽, 현 기념표석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곳에 설치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은 북경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mont, 梁棟材, 1736~1812, 요셉)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세례명을 베드로로 정하고 세례를 받고 귀국, 그해 9월(음력)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2), 정약용(丁若鏞, 요한, 1762~1836)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요한), 최인길(崔仁吉, 1765~1795, 마티아), 김종교(金宗敎, 1754~1801, 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신앙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기록에 근거해 그 근처에 기념 표석을 건립했다.
표석은 현재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05 건물 ‘두레시닝(주)’ 앞 현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변 인도에 세워져 있다. 이벽의 집은 수표교 남쪽, 현 기념표석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곳에 설치했다.
표석은 가로 98㎝, 세로 75㎝, 높이 20㎝ 기단석에 가로 75㎝, 세로 75㎝, 높이 76㎝의 화강석 빗돌을 올리고 오석을 붙여 한국천주교 창립 터라는 사실을 밝혀놓았다. 표석에는 "1784년(정조 8년)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1754~1785)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식이 거행돼 한국 천주교회 첫 공동체가 성립되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기념표석 근처에 있는 수표교는 청계천 복원 사업 당시 새로 놓은 다리여서 옛 수표교와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1441년(세종 23년)에 설치돼 1749년(영조 25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원래의 수표교는 청계천 수위를 재던 다리다.

■ 이벽의 수표교 집터, 혜민서 인근 유력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이벽의 삶과 신앙' 심포지엄
[2013년 11월 22일]

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베풀고 신앙집회를 가졌던 광암(曠菴) 이벽(요한 세례자, 1754~86)의 집터가 기존에 표석이 세워져 있는 청계천 북변이 아니라 청계천 남쪽 수표교동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따라 2011년 9월 서울 청계천로 105 두레시닝 건물 앞에 세운 '한국천주교회 창립터', 곧 이벽의 수표교 집터를 알리는 기념 표석은 새롭게 이벽의 집터로 추정되는 수표교길 서남쪽 끝자락에 가까운 지점으로 옮기고 기념관을 설립하자는 제안이 제시됐다.

서종태(스테파노) 전주대 언어문화학부 교수는 11월 22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서 '요한 세례자, 이벽의 삶과 믿음'을 주제로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최창화 몬시뇰)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벽은 지난 3월 주교회의 봄 정기총회를 통해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라는 제목의 제2차 시복 추진 대상자에 선정돼 시복작업에 들어가 있는 터여서 교회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벽의 수표교 집터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에 나선 서 교수는 정약용(요한)이 짓고 쓴 정헌(貞軒) 이가환의 묘지명과 「중용강의보」, 「한국지명총람」 등 이벽의 집터에 대한 문헌고증을 통해 이벽이 살았던 서울의 집터는 청계천 남쪽 남부의 훈도방(薰陶坊) 수표교동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이벽이 수표교동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확인된 1779년은 영조가 청계천을 준천한 지 19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로, 이벽의 집터는 지대가 약간 높아 당시 사람이 살기에 더 적합했던 수표교길 서쪽, 그 중에서도 서남쪽 끝자락 혜민서 인근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서 교수는 이어 이벽의 집터는 △한국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신앙으로 받아들여 실천의 길을 연 곳이고 △이승훈(베드로)이 베이징에서 들여온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해 신앙실천에 필요한 내용을 두루 알게 된 곳이며 △한국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선교한 곳이고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는 일을 막으려는 유학자들, 곧 이가환이나 이기양 등과 토론을 벌여 승리를 거뒀던 곳이며 △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베풀어 신앙공동체를 탄생시키고 신앙집회를 가졌던 곳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영남대 국사학과 김정숙(아기 예수의 데레사) 교수는 '이벽의 삶과 신앙'이라는 발제를 통해 "광암 이벽은 33세의 나이로 매우 짧은 생을 살고 성경의 요한 세례자처럼 교회의 길만 예비하고 떠났다"면서 자신의 저서인 「성교요지(聖敎要旨)」에 실린 49편의 시를 통해 이벽은 성경 내용과 영혼 개념, 심판과 부활, 예수 말씀을 전하고 또 신앙 실천의 삶을 살았다고 강조했다.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한민택 신부는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의 출발-한국교회 창립사 이해를 위한 신학적 시도'에 관한 발표를 통해 "세례 받지 않고 교회로부터 정식으로 파견되지 않은 한국의 초기 신앙인들을 한국교회 창립자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은 오늘의 한국 가톨릭교회에 유보된 것이며, 보편교회는 그들을 창립자라고 부르는 것을 금지시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오히려 보편교회를 상징하는 이들은 서슴없이 그들을 '한국교회의 창립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면서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지닌 독특하고 놀라운 역사와 더불어 그 역사를 아름답게 써내려간 이들을 기억하고 기념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는 축사를 통해 "교회는 항상 역사의식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시대의 징표를 살펴봐야 한다"면서 "그동안 잊힌 듯 보이던 성지와 교회사적지들, 곧 오늘 심포지엄의 주인공인 이벽 요한 세례자의 집터 등을 다시 중요하게 다루게 된 점은 무척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평화신문 [2013. 12. 01발행, 1242호]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이벽, 새벽을 열다』 심포지엄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 주최
[2015년 9월 24일 ]

▲ 이벽 요한 세례자의 집터
이벽(요한 세례자, 1754∼1786)의 집터가 청계천 남쪽 훈도방 수표동으로 추정된다는 기존 주장과 관련,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이뤄진 행정구역 개편 양상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안창모(요한 크리소스토모) 경기대 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는 9월 24일 서울역사박물관 1층 강당에서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조규만 주교) 주최로 열린 ‘이벽, 새벽을 열다’ 주제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밝혔다.

안 교수는 이날 ‘이벽의 수표교 집터에 관한 고찰’에서 “이벽의 집터 근처에 있었다는 수표교가 18세기 기록에는 지금의 청계천 남쪽인 훈도방이 아니라 청계천 북쪽인 장통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면서 “수표교의 남쪽과 북쪽 중 어느 곳을 수표동으로 부르느냐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18세기 도성대지도의 수표동변계는 중부 장통방 소속이기에 이벽의 집은 청계천 북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한국지명총람」의 수표동에 대한 해설에서는 수표동이 명확하게 청계천 남쪽 훈도방 소속으로 돼 있어 상반되는 기록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수표교남변계나 1863년에 출간된 「국상시원역등성책정식」에는 수표계가 청계천 남부 소속이 된다고 덧붙였다.
안 교수는 이어 “이벽의 집터가 어느 곳인가에 대한 답을 내기엔 아직 충분한 문헌 자료나 증언이 확보되지 않았다”며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선 행정구역 개편과 관련된 추가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 이벽의 서학 탐구와 서울 거처 및 천주교 수용 시기
한편, 서종태(스테파노)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이벽의 서학 탐구와 서울 거처 및 천주교 수용 시기’를 주제로 한 발표를 통해 “「중용강의보」와 이가환 묘지명 등 자료로 미뤄 판단할 때 이벽은 한양 저동에 살면서 북학파를 통해 서학을 탐구하다가 1784년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들여오고 나서 거처를 수표동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이승훈 등과 천주교 서적을 읽고 지인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고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했다고 생각된다”고 전했다. 이어 “이벽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시기는 천주교 서적을 비밀리에 읽고 있던 1783년 겨울 무렵부터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수표교 (水標橋)
조선 세종 때 청계천에 가설한 돌다리이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다. 현재 장충단 공원 입구에 놓여있는 돌다리로,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서울 중구  장충동2가 197-1)로 옮겨왔다.
화강암을 짜 맞추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도 2단을 이루고 있다. 그 중 윗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모두 9줄 5열로 배열한 돌기둥 위에는 양 끝을 반원형으로 다듬은 굵고 긴 석재를 세로로 걸쳐놓았고, 그 위에 바닥돌을 가로·세로로 짜 맞추어 바닥면을 구성하였다.
바닥의 양쪽 언저리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한쪽마다 엄지기둥 11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동자기둥 1개씩을 세워 6모로 된 난간석을 받쳤다. 난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재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을 모티프로 하여 설계되어 있는데 그 조각들이 매우 아름답다. 이는 조선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당시에는 이곳에 소시장이 있었다 하여 ‘마전교 ’라 불리었다. 세종 23년(1441) 수표(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 ’라 부르게 되었다.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로, 조선조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왔다.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1754-1785?)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성립 주역 가운데 한사람.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이다. 저서로 <숭례의설>(崇禮義說)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그는 일찍부터 천주교 서적을 읽고 스스로 교리를 이해한 뒤, 녹암계(鹿菴系)의 인물들이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1784년 겨울에는 이승훈 등과 함게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를 마련하였고, 그 주역이 되어 활동하다가 을사년(1785) 봄의 추조적발시건(秋曹摘發事件 즉 明禮坊事件)으로 인해 집안에서 연금 생활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이벽은 정약현의 자형으로 나주 정씨(羅州丁氏)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자, 정약현의 아우인 정약전·약용(若鏞, 사도 요한)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이벽이 기해년(1779) 겨울,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을 스승으로 삼아 강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곳을 찾아가 함께하였으니. 그 장소가 바로 주어사였다.
이때 이벽은 강학의 주제로 서학서의 내용을 제기하였고. 그 결과 주어사 강학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게 된 것 같다. 이후에도 이벽은 정약전과 만나 서양의 기하학 · 역학 ·수학에 대해 토론하거나 꾸준히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였다. 또 주어사 강학이 있은 지 2~3년 뒤에는 녹암계 인물들 가운데서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벽은 이후 광주를 떠나 한양의 수표교 인근으로 이주해 살았다.
또 어느 정도 교리를 이해하게 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북경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벽은 1783년 말에 지우 이승훈(베드로)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이승훈을 찾아가 '선교사들에게 기도문과 서적들을 얻어오고 영세를 하라'고 요청하였으며. 그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실제로 이승훈은 1783년 말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북당(北堂)으로 선교사들을 방문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예수회 선교사 그랑몽(J.J. de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의 귀국과 동시에 교회 창설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때 이벽은 이승훈이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을 얻어 읽는 동안 그 교리가 진리이며.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1784년 여름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정약전 · 약용 형제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주었고, 사헌부 지평 이가환(李家煥)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교회 서적을 가지고 양근의 감호(鑒湖, 현 양평군)로 스승 권철신과 권일신 (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형제를 방문하여 그 내용에 관해 토론한 다음 수표교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으로 이승훈을 비롯하여 권일신. 정약전 · 약용 형제가 모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승훈은 자신이 북경 선교사들에게서 배운 대로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니. 이 최초의 세례식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의 성립'이다. 당시 정약전을 제외한 이벽 ·권일신 ·정약용이 세례를 받았다. 교회 공동체 성립 후 이벽은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 결과 얼마 안되어 이벽의 집에서는 두 번째 세례식이 있었고. 여기에서 홍낙민(洪樂敏, 루가), 최창현(崔昌顯, 요한),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등이 세례를 받았다. 이 무렵 이벽의 스승 권철신을 비롯하여 그의 아우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운 충청도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전라도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도 영세를 하였다.
이제 천주교의 종교 운동은 이승훈과 이벽의 주도 아래 빠르게 확산되어 갔고. 김범우가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 한 켠을 집회 장소로 제공해 줌으로써 초기의 신앙 공동체는 수표교에서 명례방으로 이전되었다. 1785년 봄, 초기의 신자들은 이벽의 주도 아래 명례방에서 집회를 가졌다. 바로 그때 형조의 금리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우연히 그 집회 장소를 수색하게 되었으며, 그곳에 모여 있던 신자들이 모두 형조로 압송되는 소위 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집주인 김범우는 단양으로 유배되고. 이승훈과 이벽은 집안 식구들에 의해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특히 이벽의 부친은 그가 동료들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집안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한 다음. 이벽이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이벽은 그 해 여름(혹은 이듬해 봄)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이벽은 사망 후 선산이 있는 포천의 화현리(현 포천군 내촌면 화현 3리)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두 부인도 훗날같은 무덤에 합장되었다. 화현리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1979년 초였다. 이어 그 해 4월 10일에는 이벽과 두 부인의 묘가 발굴되고 그 안에서 지석이 확인되었으며, 이들의 유해는 6월 21일에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천진암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 순교자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
최초의 한국인 세례자요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설립 주역의 한 사람이다.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晩泉). 본관은 평창(平昌). 이가환(李家煥)의 생질이며 정약용(丁若鏞)의 매부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78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던 중 이벽(李檗)과 사귀게 되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1783년 말 이벽의 권유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 그곳의 북당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874년 초 교리서적, 십자고상, 상본(像本)을 갖고 귀국, 이벽, 정약용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되게 하였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친척과 집안 식구들의 탄압으로 배교,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1787년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泮村, 현재의 惠化洞)에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89년 평택 현감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90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지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조상 제사 문제로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
1794년 12월(음)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듬해 6월(음)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이듬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의 국청에서 배교했으나 4월 8일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 후 1856년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던 인물이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그로부터 신앙을 찾은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李在誼)는 1866년에, 증손 이연구(李蓮龜), 이균구(李筠龜)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승훈의 유고문집으로 ≪만천유고≫가 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 정보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 (관수동 152-1)
105, Cheonggyecheon-ro, Jongno-gu, Seoul  
지리좌표 북위 37°34′09.4″ 동경 126°59′37.4″ 
연락처 명동 주교좌 성당 (02) 774-1784 FAX (02) 753-1784  
홈페이지 명동 주교좌 성당 http://www.mdsd.or.kr  
미사시간 [명동 주교좌 성당]
평일 : (월-토) 오전 6:30 오후 6:00, 7:00 (월 7:00 미사 없음)
주일 : 오전 7:00, 9:00, 10:00, 11:00, 12:00, 오후 4:00, 5:00, 6:00, 7:00 , 9:00 (토) 오후 6:00, 7:00
[명동 성당 지하 성당] (월-토) 오전 10:00
English Mass(일) : 9:00 A.M.(At the main altar of Cathedral) 
교통편 청계천2가 4거리(삼일교)에서 수표교 직전 (주)두레시닝 앞 인도에 세워져 있다. 
서울대교구의 성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사제 성소의 요람  종로/중구
 경기 감영 터  하느님의 종 조용삼 베드로가 옥중에서 세례 받고 신자들을 감동시킨 순교 터  종로/중구
 광희문  박해 당시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내던져 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종로/중구
 김범우 토마스 집 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 김범우의 집 터  종로/중구
 노고산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마포/용산
 당고개 순교 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  마포/용산
 명동 주교좌 대성당과 지하 묘역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며 순교자 유해가 모셔진 곳  종로/중구
 삼성산 성지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순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동작/관악/금천
 새남터 순교 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많은 성직자, 지도자들이 치명한 순교 성지  마포/용산
 서소문 밖 순교 성지  44분의 성인 성녀와 25분의 하느님의 종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  종로/중구
종로/중구의 여행지
 경복궁(景福宮)  규모와 건축미를 자랑하는 조선의 정궁  종로/중구
 남산골 한옥마을  전통정원과 전통한옥 다섯 채를 옮겨 조성한 한옥마을  종로/중구
 덕수궁 (德壽宮)[경운궁(慶運宮)]  근대식 전각과 서양식 정원 등 중세와 근대가 잘 어우러진 궁궐  종로/중구
 북촌 한옥마을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 해온 전통 거주 지역  종로/중구
 종묘(宗廟)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곳  종로/중구
 창경궁(昌慶宮)  상왕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  종로/중구
 창덕궁(昌德宮)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궁궐  종로/중구
종로/중구의 맛집
 서울 종로구 : 광화문, 종각, 서대문 주변 맛집들  성지 : 의금부, 형조, 우포도청, 전옥서, 경기감영 주변  종로/중구
 서울 종로구 : 종로, 을지로 3⋅4가, 혜화동, ...  성지 : 좌포도청, 이벽의 집터, 종로성당 주변,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성당, 가회동성당 주변  종로/중구
 서울 중구 : 을지로 2가, 명동 주변 맛집들  성지 : 명동성당, 김범우 집터 주변  종로/중구
 서울 중구 : 을지로 6가 주변 맛집들  성지 광희문 주변  종로/중구
 서울 중구 : 의주로, 중림동 주변 맛집들  성지 : 서소문밖 성지, 중림동성당 주변  종로/중구
목록
27   서울대교구 :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 터
2014년 8월 16일에 열린 124위 한국 복자 시복식 터
한국 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순간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2014년 8월 16일 ...
26   서울대교구 : 석정골 보름 우물
주문모 신부가 세례 줄 때 사용한 우물
서울 북촌 종로구 계동 25번지에 ‘석정(石井) 보름 우물’이 있다. 우물이 돌로 되어 있어서 동네 이름을 ...
25   서울대교구 : 새남터 순교 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많은 성직자, 지도자들이 치명한 순교 성지
새남터는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명 중 11명...
24   서울대교구 :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1984년 5월 6일에 열린 103위 한국 성인 시성식 터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집전으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
  서울대교구 : 이벽 세례자 요한의 집 터 :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식 터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식이 거행된 수표교 이벽의 집 인근 기념표석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175...
22   서울대교구 : 김범우 토마스 집 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 김범우의 집 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로 불리었고 최근에는 순교자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토...
21   서울대교구 : 의금부 터
조선 시대 사법 기관으로 천주교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
조선 시대 법을 다루는 사법 기관은 일반적으로 형조, 한성부, 사헌부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외에 노비의...
20   서울대교구 : 형조 터
수많은 신앙선조들이 압송되어 문초를 받었던 신앙증거 터
조선시대의 중앙 행정조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의정부와 6조이다. 의정부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
19   서울대교구 : 전옥서 터
조선 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
조선 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으로 문종 때 전옥서로 개칭하였다. 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18   서울대교구 : 우포도청 터
한성부의 치안을 담당하던 관서로 수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
좌·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때 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17   서울대교구 : 좌포도청 터
한성부의 치안을 담당하던 관서로 수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
좌·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때 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16   서울대교구 : 종로 성당 : 포도청 순례지 성당
좌⋅우포도청 순교터 순례지 성당
조선시대의 좌 ·우포도청은 서울의 중요한 순교터일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 최대의 신앙 증거터이다. 또한 ...
15   서울대교구 : 가회동 성당 : 첫 미사 봉헌 기념 성당
주문모 신부에 의한 최초 미사 봉헌 터인 ‘계동 최인길의 집 터’ 관할 성당
계동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서 첫 미사...
14   서울대교구 : 노고산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노고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亨, 라우렌시오, 1796~1839) 주교...
13   서울대교구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사제 성소의 요람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있는 성신교정은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신학연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
12   서울대교구 : 경기 감영 터
하느님의 종 조용삼 베드로가 옥중에서 세례 받고 신자들을 감동시킨 순교 터
서대문 밖에 있던 경기 감영은 1800년 부활 축일에 여주에서 체포된 예비신자 하느님의 종 조용삼이 옥중에...
11   서울대교구 : 광희문
박해 당시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내던져 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광희문(光熙門)은 박해 당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체포된 수많은 교우들이 서울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와서 ...
10   서울대교구 : 당고개 순교 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
9   서울대교구 : 명동 주교좌 대성당과 지하 묘역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며 순교자 유해가 모셔진 곳
명동 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며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수표교의 이웃이자 여러 순교자...
8   서울대교구 : 삼성산 성지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순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서울 관악구에 있는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세 명의 성직자인 ...
12
 공지사항 | 자주묻는 질문 | 사이트맵 | 건의 및 불편사항 | 사이트 소개
COPYRIGHT  2004 - 2020  PAX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