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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좌포도청 터
테마 분류 :: 성지 지역 분류 :: 서울대교구 > 종로/중구
한성부의 치안을 담당하던 관서로 수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

좌·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때 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임금 거동시의 호위를 맡거나 유언비어 유포, 위조엽전 제조, 도박, 밀주 행위 등을 단속하였다. 포도청은 이후 350여 년간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무청으로 개편 되었다.
서울 파자교(把字橋 ) 동북쪽(현 종로구 묘동 56) 즉 옛 단성사 자리에 있던 좌포도청에 서는 서울의 동부 · 중부 · 남부 지역과 경기좌도 일대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경기좌도는 지금의 강화, 인천, 수원, 양평, 광주의 이남 지역을 말한다. 이중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좌포도청의 관할 구역인 경기좌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우포도청보다는 좌포도청에서 훨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포도청은 죄인을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나, 북산사건(北山事件)을 계기로 천주교 문제에 직접 관여하여, 당시 포도청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법 이외의 형(濫刑 남형)이 자주 적용되었다. 북산사건은 1795년(을묘년) 북산(즉 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거처가 밀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좌포도청(좌포도대장 조규진)에서는 주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포교와 포졸들을 계동으로 급파했으나 지도층 신자들의 기지로 체포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신부 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사바) 등 3명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에서 혹독한 매질로 순교에 이르도록 했으니, 이것이 을묘박해(乙卯迫害)이다. 을묘박해로부터 6년이 지난 1801년에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였다. 박해령이 내려지자 조정에서는 양 포도청에 명하여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지도층 신자들은 형조와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남은 신자들 대부분은 좌·우 포도청으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로써 포도청은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순교터요 신앙 증거 터가 되었다. 이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일은 좌·우포도청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1833년에는 충청도 홍주 출신 황석지(베드로)가 아현의 조카집에서 체포되어 좌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옥에서 병사로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839년 의 기해박해 때는 다시한번 많은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성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나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성 정하상(바오로), 성 유진길(아우구스터노) 등은 포도청의 모진 형벌을 이겨내야만 하였다. 특히 성 정국보(프로타시오), 성 장성집(요셉),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등은 포도청의 매질 아래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고, 13세의 어린 성인 유대철(베드로), 성 민극가(스데파노), 성 정화경(안드레아)등은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밭아 순교하였다.

한국 성인 103위 가운데서도 23명이나 포도청에서 옥사했다. 신자들의 처형은 좌·우포도청의 옥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우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좌·우 포도청에서 신자들을 심문할 때 형조보다도 매질을 더 심하게 하였기 때문에,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많았는데, 병사(病死) 또는 물고(글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고의가 아닌 죽음’이란 말이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인 장살(杖殺)에 속함)라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볼 때 좌·우포도청 자리는 박해시기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1775년(영조 51년)에서 1890년(고종 27년)까지 포도청에서 처리한 사건을 정리한 《포도청 등록》에는 천주교인들을 사학죄인이라 하여 체포하고 처형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즉 《우포도청 등록》과 《좌포도청 등록》에는 183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천주교에 연루되어 체포된 500여 명의 심문 기록이 실려 있다.
박해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 ․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 ․ 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따라서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포도청에서 순교했다고만 알려지고 있다. 아래 순교자 자료도 좌 ․ 우포도청이 구분되지 않은 순교자들이다.
좌포도청 표지석은 구 단성사 건물앞 인도에 설치되어 있다.

※ 포도청에서의 대표적인 형벌

○ 장형
곤(棍, 즉 곤장)이나 장(杖), 치도곤 등으로 때리는 형벌
○ 주뢰(주리)  
① 가위 주뢰 : 두 무릎과 발목을 동시에 묶고 두 개의 나무막대로 정강이를 활처럼 휘게 하는 형벌
② 줄 주뢰 : 발목을 묶고 굵은 밧줄로 넓적다리를 엇갈리게 묶은 다음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형벌
③ 팔 주뢰(황새 주뢰) : 두 팔을 어깨가 맞닿도록 뒤로 묶은 다음 나무를 엇        갈리게 집어넣고 팔이 활처럼 취게 하는 형벌
○ 학춤
죄인의 옷을 벗긴 다음, 두 손을 등 뒤로 잡아매고, 대들보 장대에 매단 후, 등나무 줄기로 때리는 형 벌        
○ 주장질
팔과 머리털을 뒤로 엇갈리게 묶고 사금파리 위에 무릎을 꿇게 한 뒤, 다리나 허벅지 등을 붉은 색 몽둥이[주장]로 짓이기는 형벌        
○ 압슬
죄인으로 하여금 가부좌를 틀게 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은 다음, 무릎위에 목판이나 무거운 돌을 올려놓아 뼈를 부수는 형벌        
○ 톱질
죄인을 형틀 의자에 묶은 다음, 털로 꼰 줄로 다리를 돌려 감고 톱질하듯이 양쪽에서 당겼다 놓았다 하는 형벌        

■  순교자


◆ 성녀 김 데레사(1796∼1840)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이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 요셉과 혼인하였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에서 순교하자 가난하게 혼자 살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정정혜와 함께 유방제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1일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김 데레사는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 내고, 옥에서 만난 이광헌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44세의 나이로 이 아가타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성녀 김 루치아(1769∼1839)
김 루치아는 서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구였다. 그래서 ‘꼽추 루치아’로 불렸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결국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살면서 병자들을 돌보며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성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나이가 많아(71세) 형벌은 받지 않았으나 온갖 교활한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김 루치아는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마침내 9월 어느 날 포도청에서 기력이 다해 옥에서 죽음으로써 순교하였다.

◆ 성녀 김 바르바라(1805∼1839)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 바르바라는 13세경 서울로 올라와 교우 황 마리아의 집에서 식모로 생활하며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동정으로 살고자 결심하였으나 혼기가 차자 부모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외교인과 혼인하여 남매를 두었다. 혼인한 지 15년 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딸 하나만을 데리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3월 김 바르바라는 몸 붙여 살던 집에서 집주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가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다. 3개월 옥살이 끝에 5월 27일 굶주림, 기갈, 염병 등으로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35세였다.  

◆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하였고, 열렬한 신앙으로 전교 활동을 펼쳐 자신이 사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세례를 받고 서울로 이사한 뒤 자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인으로 밀고 되었으나 미리 피신하였고, 고향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 체포되었다. 그러나 김성우도 이듬해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감옥에서도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여 2명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 옥살이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대를 맞고 이튿날 교수형을 받아 4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녀 김임이 데레사(1811∼1846)
동정 순교자 김임이는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7세 때 이미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뒤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20세 때 아버지를 여윈 뒤 오빠와 함께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였고,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이문우의 양모 오 바르바라의 집에서 5년 동안 살다가 1845년 김대건 신부의 집에 하녀로 들어갔다. 이듬해 5월 김 신부가 체포되자 당시 회장이었던 현석문은 김 신부의 집에 남아 있던 여교우들을 새 집으로 피신시켰는데, 7월 11일에 포졸들이 새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하여 현석문, 이 아가타, 정철염 등과 함께 체포된 그는 9월 20일, 매를 심하게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 성 남경문 베드로(1796∼1846)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남경문은 20세 때 교우 처녀 허 바르바라와 혼인하였는데, 큰 병에 걸려 대세를 받고 회복된 뒤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여 석방되고 나서는 첩까지 거느리고 3년 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대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신 다음 과거의 죄를 보속하고자 극기하고 인내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교우들에게 순교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임성룡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남경문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 내고 마침내 9월 20일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5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민극가 스테파노(1787∼1840)
민극가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뒤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이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7년 뒤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극가는 집을 나와 서울, 경기 지역을 전전하며 교리 서적을 팔아 생활하였다. 또 어디서나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 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 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하였거나 마음이 약해진 교우들에게 신앙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녀 우술임 수산나(1803∼1846)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우술임은 15세 때 인천의 한 교우와 혼인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다. 182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을 뻔 하였으나 해산이 임박하여 두 달 동안 옥살이를 하고 풀려 나왔는데, 그 때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남편을 여의고 1841년 상경하여 교우들의 집에 몸 붙여 살다가, 과부인 이간난과 함께 살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김 신부의 집에 있던 여교우들은 이간난의 집을 거쳐 새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이 때 이간난도 함께 피신하였다. 결국 우술임은 혼자 남아 이간난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 11일에 체포되었다. 9월 20일에 매를 맞아 반죽음이 된 몸으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4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유대철 베드로(1827∼1839)
유진길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유대철은 어려서 입교한 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천주교를 반대하는 어머니와 누나가 그를 괴롭혔으나 그 때마다 어머니와 누나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유대철은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순교하는 것을 보고 순교를 결심하여 자수하였다. 그는 포도청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받았는데,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 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에게 “믿고말고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화가 난 형리가 시뻘겋게 단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 하니,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열네 차례의 신문을 받고 100여 대의 매와 40여 대의 치도곤을 맞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유대철은 언제나 평화롭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형리들은 유대철을 배교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10월 31일 몰래 목을 졸라 죽였다. 그는 103위 성인 중 가장 어린 순교자이다.

◆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1761∼1839)
유 체칠리아는 명도회장 정약종의 부인이며 성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이다. 상처한 정약종과 20세에 혼인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혼인 3년 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이 순교한 뒤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의 집에서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조카의 피신 권유를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와 함께 체포되었다. 유 체칠리아는 72세의 고령임에도 포청에서 곤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103위 성인 가운데 최고령 순교자이다.  

◆ 성 유정률 베드로(1837∼1866)
유정률은 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畓峴里, 일명 논재)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짚신을 엮어 팔며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864년경 교리를 배우고 서울로 올라와 장 시므온(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극기하고 인내하는 생활을 하였고, 그의 달라진 모습을 본 아내도 감동하여 입교하게 되었다. 1866년 초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유정률은 친척들에게 세배하면서 자신의 순교를 예감한 듯 “안녕히 계십시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인사하였는데, 과연 그 날 저녁 이웃 마을인 고둔리의 공소에서 교우들과 함께 성서를 읽다가 체포되어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유정률은 이미 체포된 100여 명의 교우와 함께 문초를 받았고, 다른 교우들은 혹형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배교하였지만 그는 홀로 신앙을 지켰다. 이에 분노한 감사는 배교한 교우 100여 명을 시켜 그를 세 대씩 때리게 하였다. 결국 체포된 다음 날인 2월 17일, 유정률은 300여 대의 매를 맞고 3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 성녀 이 가타리나(1783∼1839)
어려서 부모와 함께 입교한 이 가타리나는 14세 때 조(趙) 씨 성을 가진 외교인과 혼인하여 3남매를 두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 때 가타리나의 권고로 대세를 받았다. 1838년 말 자신이 살던 고장에 박해가 일어나자 가타리나는 집과 재산을 버리고 자녀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조 바르바라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주인집 세 모녀 그리고 자신의 큰딸 조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딸과 함께 신문을 받고 한 차례의 주리를 당한 다음 옥에 갇혔으나, 옥이 워낙 비좁고 불결하여 3개월이 지난 9월 어느 날 57세 나이에 염병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 성녀 이 바르바라(1825∼1839)
이 바르바라는 독실한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서울 청파동에서 이영희, 이정희 두 이모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4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체포되어 포청에서 신문을 받은 뒤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어린 것이 요물이라 하여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다시 포청으로 송환되었다. 포청에서 이 바르바라는 전보다 훨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꿋꿋이 참으며 함께 갇혀 있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함으로써 15세의 어린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녀 이 아가타(1823∼1840)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과 권희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였다. 기해박해 초인 1839인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뒤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다시 보냈다. 포청에서는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이 아가타에게도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 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90대를 맞고,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성녀 이간난 아가타(1814∼1846)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이 아가타는 18세 때 혼인하였다가 3년 만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 때 외할머니의 권유로 교리를 배우고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현석문 회장이 마련한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에 현석문, 김임이, 정철염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9월 20일에 6명의 교우와 함께 3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성 이호영 베드로(1803∼1838)
이호영은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으며, 신유박해 후 어머니와 과부가 된 누나 이조이 아가타와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이사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중국인 신부 유방제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5년 2월(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고 참아 내어 결국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결안(結案)의 독령근가회(犢聆僅价壞, 邪學罪人)이라는 문구에 대하여,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정도(正道)이며 거룩하고 참된 도(道)이기에 수결(手決:서명)할 수 없다고 버티자 포졸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나 이조이 아가타와 함께 한날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1838년 11월 25일(음력 10월 8일) 긴 옥살이에서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 성 임치백 요셉(1804∼1846)
‘군집’(君執)으로도 불리던 임치백은 한강변의 한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30년에 천주교를 알았으나 입교하지는 않았고, 천주교와 천주교인을 호의적으로 대하기만 하였다. 1846년 5월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혀 있는 옹진으로 가서 천주교인이라 속이고 자수하였다. 며칠 뒤 서울로 이송되어 포청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곧 세례를 받아 순교를 결심하였다. 마침내 9월 20일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를 맞고, 6명의 교우와 함께 4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성 장성집 요셉(1786∼1839)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던 장성집은 30세경에 교리를 배우고 예비신자로 열심히 생활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리에 회의를 품어 신앙생활을 중지하고 세속 향락과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하였다. 교우들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회개한 뒤로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방에 틀어박혀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기도와 성서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태도에 집안 어른들이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이 너의 신앙생활에 무슨 방해가 되느냐?" 하고 만류하자 장성집은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편이 더 낫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밝혔고, 마침내 1838년 4월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았다. 굳은 결심으로 신앙에 귀의한 장성집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할 목적으로 자수를 결심하였다가 대부의 만류로 자수하지 않았지만 며칠 뒤인 4월 6일 체포되었다. 중병이 들어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하였으나 장성집은 포청까지 걸어서 갔다. 포청에서도 신문하는 형관에게 맑은 정신으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혹형과 고문을 참아 냈다. 그 뒤 장성집은 5월 26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25대를 맞고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1799∼1839)
정국보는 원래 개성의 유명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였으나 벼슬을 하던 조부가 죄를 짓자 부친과 함께 상민으로 신분을 감추고 상경하여 선공감(線工監)에서 일하며 미천하게 살았다. 30세쯤 천주교를 알게 되자 곧 입교하여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고, 그 후로는 홍살문 근처에서 성사를 받으러 상경하는 시골 교우들을 돌보았는데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인내와 극기의 신앙 자세를 잃지 않아 모든 교우의 귀감이 되었다.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4월(음력 3월)에 밀고되어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의 형벌과 고문은 참아 냈으나 형조에서는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마자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형조에 들어가 배교를 취소하며 다시 체포해 달라고 간청하였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5월 12일(음력 3월 그믐) 고문의 여독과 염병으로 들것에 실린 채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구, 그 날로 체포되어 5월 20일(음력 4월 7일) 포청에서 곤장 25대를 맞고 이튿날 새벽에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 성녀 정철염 가타리나(1817∼1846)
정철염은 경기도 수원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포천의 어느 양반집 하녀로 들어갔는데, 주인집 가족 가운데 한 교우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20세 되던 해 동짓날 미신 행위에 참여하라는 주인의 지시를 거부하였다가 혹독한 벌을 받았고, 이듬해 봄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자 서울로 피신하여 교우들의 집에 몸 붙여 살았다. 1845년에는 김대건 신부 집에 하녀로 들어갔고, 이듬해 김 신부가 체포되자 현석문 회장이 마련한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에 체포되었다. 9월 20일에 6명의 교우와 함께 3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정화경 안드레아(1807∼1840)
충청도 정산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은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이곳에서 회장을 맡아 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하며 힘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의 마음을 북돋아 주었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 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 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9월에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이듬해 1월 23일 33세의 나이로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성녀 조 막달레나(1807∼1839)
어려서 어머니 이 가타리나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조 막달레나는 외교인 친척들의 반대로 7∼8세경부터 교우 집안인 외가에서 살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세 때 혼담이 오가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는 혼담을 피해 서울로 가서 5∼6년을 지냈다. 그 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외교인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죽어 가는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8년 말 박해를 피해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살다가 1839년 6월에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한 차례의 신문과 주리를 당한 뒤 옥으로 끌려간 조 막달레나는 3개월의 옥살이 끝에 염병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최경환은 충청도 홍주 지방 다락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1836년 아들 최양업을 나 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했다.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동리 교우와 가족 등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여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대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3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1799∼1846)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14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21세 때 결혼하고 나서 경기도 양지의 은이 마을로 이사했고, 원래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에다 뛰어난 덕행과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 7월 말 한이형은 포졸들이 은이 마을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후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포졸들의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어서 포졸들은 한이형을 말에 태워 가려 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산을 올랐던 예수를 본받기 위해 백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이렇게 압송된 한이형은 포청에서도 심한 형벌을 받았으나 이겨내고, 드디어 9월 20일 마지막으로 곤장 70도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성 허협(또는 허임) 바오로(1795∼1840)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허협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8월에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처음엔 잘 참다가 형벌을 이겨 내지 못하고 배교의 뜻을 밝혔으나 곧바로 배교를 취소하였다. 형리가 배교 취소의 표시로 인분 한 사발을 마시라고 하자 아무 거리낌 없이 인분 한 사발을 다 마심으로써 자신의 배교 취소를 증명해 보였다. 그 뒤 허협은 여러 달 동안 포청옥에서 치도곤 130대 이상을 맞으며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내고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옥사하여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 복자 윤유일 바오로(1760∼1795)  
윤유일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뜰(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그는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신자가 바로 바오로였다. 이에 따라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구베아 주교를 만나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그가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이후에도 바오로는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최인길, 윤유일, 지황은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6세였다.  

◆ 복자 최인길 마티아(1765∼1795)    
1765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세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이냐시오)은 그의 동생이다.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후 마티아는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마침내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 초 마티아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마티아는 이때부터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안되어 한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 신부는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 나와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인길은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과 지황(사바)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마티아의 나이는 31세였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 복자 지황 사바 (1767∼1795)  
지황 사바는 1767년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1789년 이래 조선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었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것은 1793년이었다. 이때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유일(바오로)을 비롯하여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 다음 윤유일은 그곳에 남고, 사바와 요한이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로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해 실패하여 지황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문모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는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유일과 함께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밀고자에 의해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신부의 입국을 도운 사바와 윤유일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하였다. 그런 다음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사바의 나이는 29세였다.
  
◆ 복자 김이우 바르나바 ( ? ∼1801년) 
김이우 바르나바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김현우(마태오)는 그의 아우이다. 김범우로부터 교리를 배워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그는 아우 마태오와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주 신부에게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고 주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우 마태오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엄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결국 형벌을 끝까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5월경이었다.  

◆ 복자 심아기 바르바라 (1783∼1801년)  
경기도 광주 태생인 심아기 바르바라는 오빠 심낙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빠가 체포되고 그녀도 곧 체포되었다. 이후 그녀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형벌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였다. 반면에 바르바라에 앞서 체포된 오빠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무안(務安)으로 유배되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화문로 26 (묘동 56) 종로소방서와 구 단성사 자리
26, Donhwamun-ro, Jongno-gu, Seoul 
지리좌표 북위 37°34′24.5″ 동경 126°59′52.8″ 
연락처 종로 성당 (02) 765-6101 FAX (02) 765-6110 
홈페이지 종로 성당 http://www.jongnocc.com/ 
미사시간 [종로 성당]
평일 : (월수토) 오전 6:30 (화목) 오후 6:30 (금) 오전 10:00
주일 : 오전 6:30, 9:00, 11:00 오후 6:30 (토) 오후 6:30  
교통편 지하철 종로 3가역 하차하여 1호선 10번 출구, 3호선, 5호선 9번 출구로 나오면 좌포도청 터에 종로소방서와 구 단성사 건물이 있다. 
서울대교구의 성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사제 성소의 요람  종로/중구
 경기 감영 터  하느님의 종 조용삼 베드로가 옥중에서 세례 받고 신자들을 감동시킨 순교 터  종로/중구
 광희문  박해 당시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내던져 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종로/중구
 김범우 토마스 집 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 김범우의 집 터  종로/중구
 노고산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마포/용산
 당고개 순교 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  마포/용산
 명동 주교좌 대성당과 지하 묘역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며 순교자 유해가 모셔진 곳  종로/중구
 삼성산 성지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순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동작/관악/금천
 새남터 순교 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많은 성직자, 지도자들이 치명한 순교 성지  마포/용산
 서소문 밖 순교 성지  44분의 성인 성녀와 25분의 하느님의 종을 탄생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지  종로/중구
종로/중구의 여행지
 경복궁(景福宮)  규모와 건축미를 자랑하는 조선의 정궁  종로/중구
 남산골 한옥마을  전통정원과 전통한옥 다섯 채를 옮겨 조성한 한옥마을  종로/중구
 덕수궁 (德壽宮)[경운궁(慶運宮)]  근대식 전각과 서양식 정원 등 중세와 근대가 잘 어우러진 궁궐  종로/중구
 북촌 한옥마을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 해온 전통 거주 지역  종로/중구
 종묘(宗廟)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곳  종로/중구
 창경궁(昌慶宮)  상왕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궁  종로/중구
 창덕궁(昌德宮)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궁궐  종로/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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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 광화문, 종각, 서대문 주변 맛집들  성지 : 의금부, 형조, 우포도청, 전옥서, 경기감영 주변  종로/중구
 서울 종로구 : 종로, 을지로 3⋅4가, 혜화동, ...  성지 : 좌포도청, 이벽의 집터, 종로성당 주변,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성당, 가회동성당 주변  종로/중구
 서울 중구 : 을지로 2가, 명동 주변 맛집들  성지 : 명동성당, 김범우 집터 주변  종로/중구
 서울 중구 : 을지로 6가 주변 맛집들  성지 광희문 주변  종로/중구
 서울 중구 : 의주로, 중림동 주변 맛집들  성지 : 서소문밖 성지, 중림동성당 주변  종로/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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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울대교구 : 당고개 순교 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
9   서울대교구 : 명동 주교좌 대성당과 지하 묘역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며 순교자 유해가 모셔진 곳
명동 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며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수표교의 이웃이자 여러 순교자...
8   서울대교구 : 삼성산 성지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순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서울 관악구에 있는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세 명의 성직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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