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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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 구미 여진 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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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때 순교자를 배출한 교우촌

여진 교우촌은 경상도 교회의 발원지 중의 하나인 상주 이안의 배모기와 낙동강을 건너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사기점에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신라 내물왕 28년(383년) 고구려에서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온 아도화상이 냉산(일명 태조산 651m)에 입산하여 처음으로 창건한 도리사(桃李寺)가 있다. 그리고 또한 915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싸워서 크게 이긴 냉산과 일선교 사이의 격전지가 바로 이곳 여진(余津)이다. 왕건은 이 승리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이곳 낙동강의 나루터를 건널 때 "나의 나루” 곧 여진(余津)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또한 그 뿐만 아니라 이곳 선산 지방은 고려 말과 이조 초기에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 ~ 1419,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 선생과 그의 후학들인 김숙자,김종직 부자를 중심으로 크게 학문을 일으켜서 마침내 영남사림파(領南士林派)의 학통을 창시한 유명한 성리학의 고장이다. 이 지방은 옛날부터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도 부근에 이들을 배향한 금오서원(金鳥書院)이 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은 한국의 어느 지방보다도 불교와 유교 문화가 일찍부터 성장했던 고장이다.

낙산리는 사기점, 대문동, 하도, 중리, 원촌, 칠창, 여진 등 일곱 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낙산1리와 낙산2리 두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칭하여 여진이라 한다. 사기점은 숭신산성 아래에 있는 마을로 천주교도 박해 때 신도들이 이곳에 피신하여 사기를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다. 병인박해 이전부터 해평면 냉산 기슭 사기점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으며,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한 김동상(金東相)도 이곳 출신이다.
1800~1801년 신유박해, 1815년에 있었던 을해박해 이후로 영남의 교우촌은 청송, 진보, 상주 등 48개에 이르렀다. 문경 새재와 화령을 거쳐 남하한 신자들이 또 교우촌을 이루어, 1827년에는 대구를 포함하여 모두 68개의 교우촌이 영남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상주에서 대구 사이의 길목에 터를 잡은 곳이 여진이다. 이곳이 낙동강 옆의 옛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이다. 여진 공소는 1866년 병인년에 이르러 신자가 96명까지 늘어났다.

이 지방에 언제부터 복음이 전파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791년 신해박해 때 서광수의 가정에 의해서 상주 이안의 배모기에 복음의 씨가 떨어진 이후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때 복음이 경상도 전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아마 상주군과 바로 인접한 이 지방에도 복음이 전파된 듯하다. 그래서 이미 병인박해 전에 선산 지방이 고향인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동상(金東相)이 이곳에 살다가 박해를 피해 충청도 공주 부근으로 가서 살다가 병인박해를 만나 1867년에 한 마을의 많은 신자들과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끌려가서 순교하였다. 그때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었으므로 감령에서는 이 신자들을 처형하기 위해서 큰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신자들을 밀어 넣고 생매장을 시켰다고 한다. 또한 병인박해 때 이곳 여진 교우촌에도 2명의 신자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처음 신자들이 냉산(651m) 기슭의 후미진 이곳 낙산리 사기점에 안착해서는 사기와 옹기굴을 경영하면서 교우촌을 이루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첫 번째 사기점이 있었던 터에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현재의 사기점 부락에는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인 손씨가 살기 시작해서 그 후에 그의 사위인 정대진(마산교구 원로사제 정하권 몬시놀의 증조부) 가정도 이사를 와서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대진 가정은 처음 그의 큰아들 운익이 서울을 다니면서 과거 준비를 하던 중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차츰 온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후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살다가 이곳 교우촌으로 이사를 와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다시 그 후에 군위 읍내로 가서 살았으며 또한 1930년에는 그의 후손 중 정문수(정하권 몬시놀의 부친) 가정이 왜관으로 이사를 가서 현재까지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실학파에 속했던 김명양 가정도 서울서 천주교에 입교한 후 낙향하여 이곳 여진에 와서 살다가 다시 이웃 금동군 남면 부상의 교우촌으로 가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특별히 그의 장남 김석승 가밀로는 침술과 한의술에 능하여 부상 공소의 전교회장으로 활약을 많이 했으며 후에 왜관으로 이사를 가서 1928년 초창기 왜관 본당의 설립시에 전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칠곡의 신나무골 학당의 선생이었던 박내진 안토니오도 이곳 선산에서 살면서 천주교를 믿어서 신나무골 공소에 가서 학생들에게 신학문과 구학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후에 그는 다시 낙산(가실) 성당으로 초빙되어 가서 교회에 많이 봉사하였다.

이렇게 해서 병인박해가 끝난 뒤인 1882년경부터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던 김보록 신부가 이곳 여진 교우촌을 갔을 때는 교세통계(1882∼1883년)에 의하면 69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고백성사 50명, 영성체를 41명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후 4년 뒤의 교세통계표(1885~1886년)에는 96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고백성사 54명, 영성체를 57명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어떤 이유 때문인지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떠나버려서 급격히 신자수가 줄어졌다. 그래서 1893년 11월에 뮈텔주교가 이 공소를 방문했을 때는 신자 가정이 겨우 이 베드로 가정 한 집뿐이었다. 이때 그곳을 방문한 뮈텔 주교의 일기에 의하면 「54세된 이 베드로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지금 군위의 옹기 마을에 살고 있고, 둘째 아들은 예전에는 거기에 있었는데 지난 봄 부터 이상한 병을 앓고 있다. 필시 문둥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한다.」(뮈텔주교일기 I.1873)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모든 신자들이 군위,예천 등지로 떠나버려서 마침내 완전히 공소가 폐허가 된 것이 그의 아들 병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옛날 여진 교우촌이 있었던 낙산리에 1980년에 새로이 공소가 설립되어 현재 20여 명의 신자들이 살고 있다.


◆ 도리사(桃李寺)
경북 구미시 해평면 냉산(冷山:지금의 太祖山)에 있는 신라시대 최초의 사찰이다. 도리사는 440년(신라 눌지왕 24) 고구려의 아도(阿道) 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불도를 닦고 귀국한 고구려의 아도(阿道)가 눌지왕 때 신라에 와서 그때까지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서 포교하기를 요청하여, 처음에는 많은 미움도 샀으나 후에 소지왕의 신임을 얻어 불교를 일으키게 되었다. 신라 19대 눌지왕 14년, 417년 경에 아도화상이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 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절을 짓고 도리사라고 했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것이 514년(법흥왕 14)의 일이므로 도리사의 창건은 이보다 70여 년이 앞선다. 즉 신라 불교는 국가적으로 공인되기 이전에 이미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창건 사실은 워낙 오래된 일이고, 또 공식적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아니다. 창건 이후의 변천 과정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어느 시기인지 모르나 창건 당시의 가람이 있었던 태조산(太祖山) 기슭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976년에는 세존 사리탑을 해체 복원하다가 금동육각사리함(국보 208호)과 부처님 사리 1과가 발견되어 현재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문화재로 보물470호인 화엄석탑이 있고, 아도화상동상(2002년 새로 건립조성), 세존사리탑, 아도화상 사적비, 조선후기 탱화가 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낙산1길 194 (낙산리 879) 사기점
194, Naksan 1-gil, Haepyeong-myeon, Gumi-si, Gyeongsangbuk-do  
지리좌표 북위 36°25′61.1″ 동경 128°36′88.0″ 
연락처 선산 성당 (054) 481-7400 FAX (054) 482-7403 
홈페이지 선산 성당 http://cafe.daum.net/seonsan82 
미사시간 [선산 성당]
평일 : (월) 오전 6:30 (동) 6:00 (하) (수) 오전 10:00 오후 (화목금) 오후 7:30
주일 : 오전 6:30 (동) 6:00 (하) 10:00 (교중) (토) 오후 7:30 
교통편 [승용차] 선산읍에서 선산중앙로와 선산대로를 따라 6km 이동하다 도개교차로에서 '대구, 가산' 방면으로 우측방향 낙동대로를 따라 600m 이동한후 동로를 따라 2km 이동한 후 낙산1길을 따라 이동한다. 
대구대교구의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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